•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1) 언문일치의 첫걸음
  • (3) 국문체

(3) 국문체

 國文體는 종래의 언문체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지만 단순한 계승에 그치지 않고 현저한 발전과 지위 향상이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문체의 지위 향상에 가장 공이 큰 것으로 기독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개화기 이전에 있어서 언문이 불교에 의해서 많이 보급되어 왔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는데, 기독교는 국문체로 성경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번역하여 적극적인 선교에 힘썼던 것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지로 건양 원년(1896) 4월 7일에 간행된≪독립신문≫이 국문체를 채택한 것도 기독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창간호 논설에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특히 빈칸 띄어쓰기를 한 것은 놀라운 선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 신문을 창간하였고 줄곧 그 논설을 쓴 徐載弼의 생각이었다. 이보다 앞서 圈點 띄어쓰기를 한 예는 더러 있었으나 빈칸 띄어쓰기는≪독립신문≫이 처음이었다. 서재필은 국어학자는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우리 나라 문자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독립신문≫간행에 즈음하여 그의 개혁안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국문에 관한 서재필의 생각은 그 창간호 논설에 분명히 나타나 있거니와,≪독립신문≫2권 92호(1897년 6월 10일)에 실린 그의 논설에서 더욱 분명하게 표명되었다. 이 논설에서 말과 글은 같아야 하는데 이는 국문으로만 달성될 수 있으며 국문의 표준화를 위하여 ‘옥편’ 즉 사전을 만들어야 함을 말하고 빈칸 띄어쓰기를 다시 한번 역설하였다. 이것은 언문일치의 이상을 천명하고 사전 편찬의 필요성을 주장한 첫 글로서 길이 기억될 역사적 문장이다.354)자세한 것은 李基文,<독립신문과 한글 문화>(≪周時經學報≫4, 1989) 참고.

 ≪독립신문≫에 이어≪일신문≫,≪뎨국신문≫등이 국문체로 발간되어 한때는 신문의 문체가 국문체로 굳어지는 느낌조차 있었다. 그러나 본래 국문체로 발간된≪대한황셩신문≫이 광무 2년(1898)≪皇城新聞≫으로 改題하고 국한문체를 택하게 되면서 신문에 국한문체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지식층의 요구였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 뒤에도 가령≪大韓每日申報≫가 국한문체로 내면서 따로≪國文報≫를 낸 것은 일반 민중을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국문체는 신문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고전문학을 보면 시가에서는 국한문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소설에서는 국문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이 전통이 개화기에 와서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부분적이기는 했으나 소설에 국한문이 등장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최초의 신소설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李人稙의≪血의 淚≫는 국한문으로≪萬歲報≫(1906)에 연재되었다(다만 한자에는 한글로 음을 달았다). 우리 나라의 현대소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20년대 초에도 국한문으로 쓰인 작품이 많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 경향도 제법 줄기찬 일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차츰 국문으로 통일되어 고전문학 이래의 전통이 지켜진 것이다.

 개화기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국문체의 확립을 위하여 힘을 기울인 학자는 周時經이었다. 그는 1898년에≪國語文法≫의 초고를 국한문체로 썼었다고 하니(1910년에 이 책을 낼 때에는 국문체로 고쳤으나 미처 못 고친 곳이 더러 있었다), 그의 국문체에 대한 신념은 그 뒤에 생긴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최초의 저서인≪國文講義≫(속 제목은≪대한국어문법≫)는 1906년에 간행되었는데 그<略例>는 한문으로, 발문은 국한문체로, 본문은 국문체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07년에 그가≪西友≫2호에 기고한<국어와 국문의 필요>란 글은 국문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도 이의 확립을 강조한 것이다. 이로 보아 주시경이 국문체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게 된 것은 대체로 1907년경이 아니었던가 한다. 1914년에 간행된≪말의 소리≫는 그의 마지막 저술로서 그 자신이 써서 석판으로 인쇄하였는데, 잘 다듬어진 순수한 국문체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국문체에 만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가로쓰기’를 꿈꾸고 있었다. 이 책의 맨 끝 페이지에 ‘가로쓰기’를 한 것이 있으며 더구나 그 내용은 ‘가로쓰기’가 글의 이상임을 명언하고 있다. ‘가로쓰기’에 대한 그의 시안은 이미 1909년에 국문연구소에 제출한 그의 최종<硏究案>에도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주시경은 문자문제에 있어서 매우 급진적인 이상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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