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2) 초기의 국문 연구
  • (1) 지석영의<국문론>과<신정국문>

(1) 지석영의<국문론>과<신정국문>

 池錫永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牛痘를 실시한 의학자로 널리 알려졌으나 일찍부터 국문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6년 11월에<국문론>을 발표했는데,355)≪대죠션독립협회보≫1권 1호, 1896년 11월. 이것은 이 방면의 최초의 글이었다. 특히 이 글 첫머리에서 “우리 나라 사람은 말을 하되 분명히 기록할 수 없고 국문이 있으되 전일하게 하지 못하여” 이것을 개선할 필요성을 역설한 것은 앞으로 전개될 국문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음의 고저를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이 주장은 그의<大韓國文說>(1905)에 이어졌으며 이를 토대로 국문체계의 통일안을 작성하여 정부에 소청한 것이 재가되어 1905년 7월 19일에 공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新訂國文>이었다. 이<신정국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ㄱ. 五音象形辨
 국문 初聲字들의 制字原理를 발음기관의 상형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池錫永의 독창적인 학설이 아니요,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며 姜瑋의≪擬定國文字母分解≫(1869)에도 이런 설명이 보인다. ㄴ. 初中終三聲辨
 崔世珍의≪訓蒙字會≫범례의 체계에 의거한 것이다. 다만 ‘中聲獨用十一字’ 속에 그가 새로 만든 ‘=’자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 ‘ㆍ’자는 제외되었다. 한편≪訓蒙字會≫의 ‘初聲獨用八字’에서 ‘ㅿㆁ’을 빼어 ‘初聲獨用六字’(ㅈㅊㅋㅌㅍㅎ)로 하였다. ㄷ. 合字辨
 이것도≪訓蒙字會≫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훈몽자회≫에서는 ‘각’자를 예로 들었는데, 여기서는 ‘강’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 다를 뿐이다. ㄹ. 高低辨
 上聲과 去聲 및 長音에 대해서 글자 오른쪽에 점을 찍도록 규정한 것이다.≪小學諺解≫의 범례에서 암시를 받은 것인데, 이미 우리 나라 사람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東’과 ‘動’의 聲調의 차이를 표시하려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으나, ‘눈’[雪]과 ‘눈’[眼]의 차이를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착안이었다. ㅁ. 疊音刪正辨
 ‘ㆍ’를 없앰으로써 당연히 ‘…’ 등 14자가 없어짐을 확인한 것이다. ㅂ. 重聲釐正辨
 된소리의 표기를 관습대로 ‘ㅺ ㅼ ㅽ ㅾ’와 같이 된시옷으로 할 것을 규정한 것이다. 개화기에는 일반적으로 된소리는 ‘ㄲ ㄸ ㅃ ㅆ ㅉ’로 표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했는데(姜瑋·李鳳雲·周時經) 池錫永은 이것을 따르지 않았다.

 이상의 간단한 요약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신정국문>은 국문체계의 개혁안이라고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것이었다. 받침으로 8자만을 사용할 것과 된소리 표기에 된시옷을 사용할 것을 규정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개혁이라고 한다면 ‘ㆍ’를 없애고 ‘=’를 새로 만든 것뿐이다. 이것은 ‘ㆍ’는 ‘ㅣㅡ’의 合音이라는 주시경의 주장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ㆍ’를 없앤 것은 주시경의 뜻과 같지만 ‘ㅣㅡ’ 합음을 나타내는 ‘=’를 새로 만든 것은 그의 뜻과 어긋난 것이었다. 말하자면<신정국문>은 정작 개혁해야 할 것은 아니하고, 엉뚱하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당시의 식자들 사이에 큰 물의를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이<신정국문>은 개화기에 있어서 국문체계의 재확립을 위한 최초의 공적 노력으로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 시행을 위한 노력도 상당히 있었던 흔적이 엿보이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새로 만든 ‘=’자가 큰 불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체계가 제시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힘을 합하여 새로운 국문체계의 확립을 위한 노력을 하게 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신정국문>이 가져온 뜻밖의 소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학부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된 것은 이<신정국문>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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