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2) 초기의 국문 연구
  • (3) 주시경의<국문론>과 그 뒤의 연구

(3) 주시경의<국문론>과 그 뒤의 연구

 주시경의<국문론>은 1897년에≪독립신문≫에 실린 것으로, 그는 그 당시 培材學堂 學員(학생)으로 이 신문사의 ‘會計兼校補員’의 일을 보고 있었다. 전후 2차에 걸쳐 실려 있어 사실상 두 개의 논설이라고 할 수 있다.357)≪독립신문≫2권 47·48호, 1897년 4월 22·24일, 2권 114·115호, 1897년 9월 25·28일.
李基文編,≪周時經全集≫상(亞細亞文化社, 1976) 소수. 필자의 이름은 ‘쥬샹호’인데 周時經의 처음 이름은 周相鎬였다.

 이 글은 22세의 청년이 쓴 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다. 전편에는 오늘날 읽어 보아도 별로 흠잡을 데가 없는 당당한 문자론이 전개되어 있고 후편에는 그가 생각하고 있던 맞춤법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어 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편이 실린 뒤에 서재필의 국문에 관한 논설이 발표되어 후편은 그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이 후편의 내용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령 ‘강’(江)이나 ‘산’(山)과 같이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은 국문으로 써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한자의 음을 국문으로 써 놓으면 한자 모르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아는 사람도 그 뜻을 알아 맞히기 어려움을 지적한 점이다. 당시의 이른바 國漢文混用體가 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이었고 국문체란 것도 이것을 그대로 국문으로만 옮겨 놓은 것이 많았음을 비판한 것이다. 이것은 언문일치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지적한 매우 중요한 발언이다. 그리고 명사 또는 대명사의 예를 들어 이들과 조사를 구별하여 표기할 것을 주장한 점도 주목된다. ‘이거시’라 쓰는 것은 문법을 모르기 때문이요 마땅히 ‘이것이’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 (1) ‘ㆍ’의 ‘ㅣㅡ’ 합음설과 (2) 새로운 받침설(‘ㄷ ㅌ ㅈ ㅊ ㅍ ㅎ ㄲ ㅄ ㄵ ㅀ’ 등의 받침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이 의아스럽게 느껴진다. 오늘날 남아 있는 주시경의 가장 이른 저술인≪대한국어 문법≫(1906)에 보면 그가 ‘ㆍ’의 ‘ㅣㅡ’ 합음임을 처음 깨달은 것은 1893년이었으며 새로운 받침에 관한 주장은 그가 1896년 5월에 독립신문사 안에 조직한 國文同式會에서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사실상 주시경이 전 생애를 통하여 주장한 가장 중요한 학설이었고 특히 새로운 받침설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는데, 뒷날 그가 국문연구소의 위원으로 가장 힘주어 주장한 것도 이 두 가지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