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2) 개설의 동기와 목적

(2) 개설의 동기와 목적

 국문연구소가 개설된 1907년은 매우 다사다난한 해였다. 이보다 2년 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었고, 국문연구소가 설치된 바로 그 달에 헤이그(海牙)密使事件이 있었고, 뒤이어 고종양위의 詔書가 내리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군대 해산식이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온 나라 안이 술렁대고 있었던 때다. 이런 때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된 것은 당시의 학계에 문자 문제에 관한 관심이 매우 컸으며, 정부 당국자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문연구소야말로 우리 나라 개화기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운동의 가장 빛나는 성과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문연구소 개설의 동기는, 크게 보면 개화과정에서 제기된 문자문제의 심각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개화의 초기부터 학자, 언론인 등이 기울여 온 노력의 집적으로, 공동연구에 의한 국가적인 통일체계를 확립할 필요성이 분명해진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이 국문연구소의 개설도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기는 앞에서 이미 말한<신정국문>과<國文一定意見>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신정국문>은 하나의 국문체계의 개혁안으로서는 여러 가지 결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비록 지석영이 당시에 상당히 유력한 인사였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의 안을 정부가 그대로 공포했다는 것은 졸렬한 처사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밝히려고 하지만, 국문연구소에서 행한 연구제목들을 보면,<신정국문>의 내용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관이라는 강한 인상을 준다.

 당시 학부 편집국장으로서 사실상 국문연구소 개설 초기부터 주동적인 위원으로 활약한 魚允迪은 국문연구소에 낸 그의 최종<硏究案>에서 다음과 같이 국문연구소의 개설을 설명하고 있는데, 매우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국문은 오랫동안 한문에 눌려 왔으나 ‘甲午維新’으로 공사문서에 통용되게 되고 비로소 국문이 귀함을 알게 되어 이를 연구할 필요를 다투어 말하게 되매, 이능화·주시경·지석영 등이 나왔고, 이로 말미암아 국문의 빛이 다시 밝아지게 되었으나 여러 학자의 학설이 각기 달라 그 폐해가 크니 그것을 통일하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학부에서 국문연구소를 설치한 이유라 하겠다.

 국문연구소를 세운 목적이 국문의 연구 및 정리에 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國文’이란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우리는 위에서도 자주 썼지만 이것은 우리 나라의 문자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말, 즉 국어는 국문연구소의 연구대상에서 일단 제외되어 있었던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문연구소의 목적은 ‘國文硏究所 規則’ 제1조에 “本所에서는 國文의 원리와 연혁과 현재 行用과 장래 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함”이라고 구체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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