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4) 사업의 경과

(4) 사업의 경과

 국문연구소는 1907년 9월 16일에 제1회 회의를 연 뒤로 그 해에 5회, 이듬해에 12회, 다시 그 이듬해에 6회, 도합 23회의 회의를 열었는데 최종회의는 1909년 12월 27일이었다. ‘국문연구소 규칙’대로 회의가 열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의에서 위원장이 문제를 제출한 것은 모두 10회 14문제였다. 이제 그 제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1회 國文의 淵源 제2회 國文 字體 및 發音의 沿革 제3회 ㆁ ㆆ ㅿ ◊ 四字의 復用 當否 제4회 ㆅ, ㅱ, ㅸ, ㆄ, ㅹ 五字의 復用 當否 제5회 ㄱ ㄷ ㅂ ㅅ ㅈ 重音(古稱 並書 俗稱 된시옷) 書法 一定 제6회 中聲에 =字 刱製 ㆍ의 廢止 當否 제7회 ㄷ, ㅅ 二字 用法 제8회 初終聲 ㅈ, ㅊ, ㅋ, ㅌ, ㅍ, ㅎ 通用 當否 제9회 七音과 淸濁의 區別 如何 제10회 四聲票의 用否   字順 行順의 次序 一定
    國語音의 高低音  綴字法
    字母 音讀 一定

 마지막 제10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1회에 1문제씩으로 되어 있다. 국문연구소는 위의 14문제에 대한 토론과 의결을 사실상 1908년 말까지 끝냈었다. 그리하여 일단 학부대신에게 그 결과를 보고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그러나 1909년에 들어<國文硏究 議定案>과 마지막까지 남은 8위원의 최종적인<연구안>으로 이루어진<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 때에는 과거에 토의된 문제들을 10제로 요약한 점이 주목된다(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밝혀지겠기에 여기서는 약한다). 이것이 완성된 것이 1909년 12월 27일이요 그 이튿날 즉 28일자로<보고서>를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보고서>에 대해서 정부는 그 뒤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국문연구소 위원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3년 동안 애써 만든<국문연구 의정안>이 이 세상에 공포되지 못하고 학부의 미결서류 속에 깊이 묻히고 말았다. 그 이유로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학부대신의 경질이다. 국문연구소를 개설하고 그 일을 계속해 온 이재곤은<보고서>가 제출되기 2개월 전 즉 1909년 10월 21일에 사임하고 李容稙이 새로 취임하였는데, 이용직은 친일파로서 이완용내각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국문연구소의<보고서>에 대한 처리를 일부러 천연시켰으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학무국장 윤치오가<국문연구 의정안>의 내용에 불만이 있었다는 설도 있으나 이것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는 국문연구소의 위원장이었으나 그의 견해는 어느 자료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다.

 국문연구소는 1909년 12월 28일자로<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그 사업을 완료하였다. 이로써 국문연구소는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보고서>의 처리가 천연되어 그 이름만은 그냥 남아 있다가 1910년 8월, 나라의 이름과 함께 이 연구소의 이름도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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