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5)<국문연구 의정안>

(5)<국문연구 의정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문연구소는 1909년에 들어 그 전에 10회에 걸쳐 14문제에 대해서 의결했던 것을 다시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학부대신에게 보고하였다. 이것이 바로<국문연구 의정안>으로 국문연구소 위원들의 협동적 노력의 결정일 뿐 아니라 개화기의 국문연구의 총 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09년에 들어 국문연구소에서는 그 전의 14제를 10제로 요약했었다. 그리하여<의정안>과 최종<연구안>은 모두 10題로 되었다.

 이<의정안>을 완성하는 것이 국문연구소의 목표였으며 이것은 정부에 의하여 공포될 것으로 예견되었던 것이나, 마침내 공포되지 않고 말았을 뿐 아니라, 그 내용조차도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것은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국문연구 의정안>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간단한 평을 붙이기로 한다.

가. 국문의 연원과 자체 급 발음의 연혁

 淵源, 字體, 發音을 나누어 논하였다. 연원에 대해서는 단군시대부터 우리 나라의 문자를 개관한 것인데 그 서술이 간결하고 오늘날 보아도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 단군시대에는 문자가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 뒤 한자가 들어와 한문으로 글을 쓰게 되어 ‘言文一致’의 상태가 되었다고 하고 신라 시대에 한자를 이용하여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생겼으나, 사용하기 어려운 흠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國文을 造作할 사상의 胚胎”라고 본 것은 탁견이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즉위 25년(1443)에 창제하고≪訓民正音≫이란 책을 짓게 하여 28년(1446)에 반포하였다고 했다. 훈민정음보다 앞서 우리 나라에 古代文字가 있었다 하나 문자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부인한 것도 매우 타당한 견해라고 하겠다.

 자체에 대해서는 먼저 “字體는 상형이니 古篆을 倣造한지라”라고 하여 鄭麟趾의 訓民正音序에 나오는 “象形而字倣古篆”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종래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었고 국문연구소에서도 이능화는 梵字 起源說을 주장했는데,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지극히 온당한 태도였다.359)훈민정음의 制字 원리가 분명히 밝혀진 것은 1940년≪訓民正音≫원본이 발견되어 그<解例 制字解>에 자세한 설명이 있음이 드러난 뒤의 일이다. 國文硏究所 위원들이 원본을 보지 않고 鄭麟趾의 “象形而字倣古篆”을 인정한 것은 매우 온당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자체의 변천으로는 初聲字 중에 ‘ㆁ, ㆆ, ㅿ’이 없어진 사실, ‘ㄲ ㄸ ㅃ ㅆ ㅉ’가 ‘ㅲ ㅳ ㅄ ㅶ’, ‘ㅺ ㅼ ㅽ ㅾ’과 혼동된 사실, ‘ㆅ’은 ‘ㅎ’과 혼동되어 없어진 사실, 순경음 4자는 우리 나라 발음에는 없는 것이어서 폐지된 사실, 終聲은 훈민정음에 “終聲復用初聲”이라 해서 초성 17자를 다 종성에 쓴 예가 있으나 뒤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ㆁ’의 8자만 종성에 쓰게 된 사실 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 ‘·ㆍ’ 등의 새 글자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널리 사용되지 않았음을 덧붙였다. 자체의 연혁이란 곧 문자체계의 역사를 의미했는데, 이 부분의 서술이 충분치 못한 것은 개화기에 이용할 수 있는 우리 나라의 옛 문헌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다.

 발음의 연혁에 대해서 먼저 훈민정음에서는 각 글자의 발음을 한자로 표시했으나≪訓蒙字會≫에 와서 ‘ㄱ’을 ‘其役’(기역), ‘ㅏ’를 ‘阿’(아) 등으로 이름을 지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초성 중 ‘ㅇ, ㆆ, ㅿ, ㆁ’은 당초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듯하지만 대체로 비슷하여 ‘ㆁ’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개화기에 가장 큰 문제가 된 중성의 ‘ㆍ’에 대해서는 그 발음이 ‘ㅡ’자와 비슷하여 국어의 음으로서는 발음하기 어려워 지금은 그릇되어 ‘ㅏ’자와 발음이 같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ㆍ’에 관한 주시경의 학설이 채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 초성 중 ㆁ, ㆆ, ㅿ, ◊, ㅱ, ㅸ, ㆄ, ㅹ 八字 복용의 당부

 먼저 ‘ㆁ’자는 지금에 사용되는 글자요 ‘ㅇ’이 없어진 글자이니, ‘ㆁ’을 ‘ㅇ’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위의 제1제에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으로, 魚允迪 위원의 주장을 따른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릇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래는 ‘ㅇ’, ‘ㆁ’ 두 글자가 있었다가 이들이 하나로 합하였는데 없어진 것은 ‘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2제는 본래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옳았을 것이다.

 이들 여덟 글자는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 데 모든 위원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ㅇ, ㆆ, ㅿ’은 위의 제1제에서 말한 바요 ‘◊’자는 ‘ㅱ’의 變體요 ‘ㅱ, ㅸ, ㆄ, ㅹ’ 등 순경음자들은 국어음에는 없으니 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다. 초성의 ㄲ, ㄸ, ㅃ, ㅆ, ㅉ, ㆅ 6자 병서의 서법 일정

 이것은 된소리의 표기에 관한 문제인데, 이 同字 並書가 다수표로 결정되었다. 李能和·周時經 등이 이것을 주장하고 池錫永은 그의<新訂國文>대로 된시옷을 주장했으며, 어윤적은 어느 쪽이나 다 같이 써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동자 병서가 타당한 이유로서는 이것이 音理에도 맞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 제자의 본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만 ‘ㆅ’은 국어음에 ‘ㅎ’만 써도 되므로 다시 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라. 중성 중 ‘ㆍ’자 폐지 ‘=’자 창제의 당부

 이것은 지석영의<新訂國文>에서 가장 크게 말썽이 된 것이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ㆍ’의 본음이 ‘ㅣ’와 ‘ㅡ’의 합음이라는 주시경의 학설에 의거하여 지석영은 ‘ㆍ’가 일반적으로 ‘ㅏ’와 혼동되어 사용되므로 이것은 폐하고 그 대신 ‘ㅣㅡ’ 합음자로 새로 ‘=’를 만든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議定案>에서는 ‘ㆍ’의 본음이 ‘ㅡㅣ’라는 明證이 없으므로 ‘=’자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고 결론하였다. 그리고 ‘ㆍ’는 ‘ㅏ’와 혼동되었으나 “制字하신 本義와 行用하던 慣例로도” 폐지함이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로써<신정국문>의 규정은 국문연구소에서 완전히 부정된 셈이다. 지석영의 주장에 찬동한 것은 李敏應뿐이었고 李能和·宋綺用·尹敦求는 반대하였고 魚允迪·周時經·權輔相은 ‘=’를 만드는 것은 부당하되 ‘ㆍ’를 폐지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주장이 더욱 온당한 것인데, 아마도 위원장이 이능화 등의 의견을 택하여 그렇게 된 듯하다.

마. 종성의 ㄷ, ㅅ 2자 용법 급 ㅈ, ㅊ, ㅋ, ㅌ, ㅍ, ㅎ 6자도 종성에 통용 당부

 이것은 주시경이 가장 강력히 주장하여 제기된 문제인 바, 그의 주장대로 ‘ㄷ’뿐 아니라 ‘ㅈ, ㅊ, ㅋ, ㅌ, ㅍ, ㅎ’을 모두 받침에 사용하도록 결정되었다. 이 규정에 전적으로 찬성한 이는 어윤적·주시경·권보상·윤돈구였고 반대한 이는 이능화·지석영·이민응이었다.

 이들 받침을 써야 하는 이유로 제시한 것은 저 위에서 말한 주시경의 이론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바. 자모의 7음과 청탁의 구별 여하

 이것은 음성학의 문제로서 자음의 새로운 분류를 결정한 것이다. 예전에는 ‘발음의 작용되는 부문’으로 牙·舌·脣·齒·喉·半舌·半齒의 7음을 구별하였고, ‘발음의 輕重 淺深’으로 全淸·次淸·全濁 등을 구별했으나 이것을 다음 표와 같이 분류하기로 정한 것이다. 7음을 5음으로 한 것은 동양 음운학의 전통적인 체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으나, 청탁의 구별에 있어서는 격음을 새로 마련하고 ‘ㄴ, ㅁ, ㆁ, ㄹ’ 등 불청불탁을 全淸에 넣음으로써 전통적 체계를 깨뜨리고 말았다. 이 체계에서는 아직 서양 음성학의 영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牙 音 舌 音 脣 音 齒 音 喉 音
淸 音
激 音
獨 音
ㅇ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ㅈ

ㅆ ㅉ

사. 4성표의 용부 급 국어음의 고저법

 四聲(平·上·去·入)은 국어음에 없으므로 사성표는 쓸 필요가 없고 ‘高低長短音’만 구별하여 장음은 글자의 ‘左肩’에 1점을 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문제 역시 지석영의<新訂國文>에서 제기된 것인데, 그의 주장 중에서 한자음에 관한 것은 채택되지 않고, 국어음에 관한 것만 채택된 것이다. 단<신정국문>에는 장음의 경우 1점을 ‘右肩’에 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는 ‘左肩’에 가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오늘날 우리가 따르고 있는 철자법은 장음을 전혀 표시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문자 이외에 기호를 쓴다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음을 표시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불편도 적지 않다. 이 문제는 아직도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 자모의 음독 일정

 이것은 한글 자모의 명칭을 새로 결정한 것이다. 전통적인 명칭은 ‘기역’, ‘디귿’, ‘시옷’ 등에서 제2음절의 불규칙성이 있었으나 이들을 ‘기윽’, ‘디읃’, ‘시읏’으로 고쳐 모두 ‘으’로 규칙화하였다.

ㆁ 이응 ㄱ 기윽 ㄴ 니은 ㄷ 디읃 ㄹ 리을 ㅁ 미음 ㅂ 비읍 ㅅ 시읏 ㅈ 지읒 ㅎ 히읗 ㅋ 키읔 ㅌ 티읕 ㅍ 피읖 ㅊ 치읓 ㅏ 아 ㅑ 야 ㅓ 어 ㅕ 여 ㅗ 오 ㅛ 요 ㅜ 우 ㅠ 유 ㅡ 으 ㅣ 이 ㆍ 

 이것은 어윤적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ㆁ’을 모든 자음의 맨 앞에 놓은 것도 그의 주장이었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될 것이다).

자. 자순 행순의 일정

 자모의 순서는 훈민정음 이후 여러 책에 서로 같지 않으나 초성은 牙舌脣齒喉의 순서로, 그리고 청음을 먼저 놓고 격음을 나중에 놓으며, 중성은≪訓蒙字會≫의 것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정을 보았다.

ㆁ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ㅎ ㅋ ㅌ ㅍ ㅊ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ㆍ

 行順이라 함은 ‘가갸거겨…’로 시작하는 문자표의 순서를 말하는 것인데 중성으로 벼리를 삼고 초성의 순서대로 벌여 놓기로 결정하였다.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以下 倣此

차. 철자법

 “綴字法은 訓民正音 例義대로 仍舊 綴用함이 可하도다”라고 간략하게 규정하였다. 당시의 학자들은 철자법이란 말을 초성·중성·종성을 결합하는 방법이란 뜻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상<國文硏究 議定案>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매우 훌륭한 문자체계와 철자법의 통일안이라고 평해서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고 믿는다. ‘ㆍ’를 그냥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한다면<국문연구 의정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체계와 철자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문자체계와 철자법은 1933년 朝鮮語學會의<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서 수립된 것인데 이미 이보다 4반세기 전에 국문연구소가 그와 같은 원리에 도달했던 것은 지극히 중요한 史實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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