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2. 한국어 연구
  • 3) 국문연구소의 업적
  • (6) 각 위원의 연구안

(6) 각 위원의 연구안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국문연구소의<보고서>는<국문연구 의정안>과 마지막까지 남은 8위원의 최종 연구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연구안은<의정안>의 내용을 밑받침하는 기초 자료로서<의정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뿐 아니라, 그 당시의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이 연구안은 ‘國文硏究’라는 표제 밑에 4책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개화기에 있어서 우리 나라 학자들의 연구가 자못 높은 수준에 도달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4책을 검토해 보면, 처음 3책은 어윤적·이능화·주시경 3인의 안이요 나머지 1책이 권보상을 비롯한 5인의 안이다. 처음 3인의 연구안은 분량도 많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훌륭하여 이 시대의 국문연구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여기서 각 위원의 연구안의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은 너무나 번거로운 일이어서 피하기로 하고 각 연구안의 현저한 특징만을 지적해 두기로 한다.

가. 어윤적

 학부 학무국장으로 국문연구소 위원을 겸하고 있었던 어윤적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주로 역사에 있었으나360)魚允迪은≪東史年表≫(초판 1915, 재판 1935)의 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문에 대해서도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국문연구 의정안>에 대한 검토에서 우리는 그의 학설이 가장 많이 반영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국문연구소에 있어서의 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국문에 대한 자못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실증적 태도로 그의 학설을 세웠으므로 당시의 학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단이 적었다는 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 단군시대에 문자가 있었다고 하나 이것은 ‘推想的 空論’에 불과하다고 배척한 점,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훈민정음 서문에서 鄭麟趾가 말한 “象形而字倣古篆”이 가장 믿을 만하며 이 古篆은 곧 梵字라고 하기도 하나 고전은 어디까지나 한자를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 등이 그의 견실한 학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에 대한 어윤적의 견해는≪訓民正音≫원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있어서 가장 정곡을 얻은 것으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는 무릇 문자구조의 원리에는 ‘象形’과 ‘演義’가 있는데 훈민정음에서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ㅇ’, ‘ㅁ’ 등을 만든 것은 상형이요, ‘ㄱ’에 획을 더하여 ‘ㅋ’, ‘ㅅ’을 병서하여 ‘ㅆ’을 만든 것은 연의라고 하였다. 연의란 말은 그가 생각해 낸 것이지만, 위의 설명은≪訓民正音解例≫(制字解)의 설명에 부합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ㅇ’이 모든 초성의 근본이요, ‘ㆍ’가 모든 중성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ㆍ’를 중성의 근본이라고 한 것은≪훈민정음해례≫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며, 초성에 대해서까지 ‘ㅇ’을 근본이라고 본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의 制字를 태극과 음양의 이치로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制字上 ‘ㆍ’를 중성의 근본이라고 보는 그의 관점은 ‘ㆍ’가 모든 모음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나는 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ㆍ’는 다른 모음들과 혼돈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ㆍ’가 ‘ㅣㅡ’의 합음이라는 주시경의 설을 부정하였으나 ‘ㆍ’자를 폐지하자는 점에 있어서는 주시경과 의견을 같이하게 된 것이다.

 한편 모든 초성을 종성으로도 써야 한다는 주장에 있어서도 어윤적은 주시경과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는 명사, 형용사, 동사 등에 ‘承接詞’(조사 또는 어미)가 붙는 경우 이들의 표기를 항상 고정되게 하려면 ‘ㅈ, ㅊ, ㅋ, ㅌ, ㅍ, ㅎ’과 같은 받침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시경의 설명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주시경의 설명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될 것이다). 그의 설명 방식이 오히려 그 뒤 우리 나라에서 일반화된 설명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나. 이능화

 법어학교장으로 다방면에 관심을 보여 많은 저서를 낸 이능화는 세계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국문연구소의 일에 대단한 열성을 보였었다.361)李能和의 저서로는≪朝鮮佛敎通史≫,≪朝鮮基督敎及外交史≫,≪朝鮮女俗考≫,≪朝鮮巫俗考≫,≪朝鮮解語花史≫등이 있다.

 그는 훈민정음의 梵字 기원설을 강력히 주장하여 훈민정음과 범자에서 모양이 비슷한 글자들을 예를 들기까지 하였다. 이 주장은 국문연구소 위원들의 찬동을 얻지 못했었다.

 한편 그는 ‘ㆍ’를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웠다. 그는 ‘ㆍ’는 본래 ‘ㅏ’와 혼동되었으나 외국에도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같은 예가 있으므로 ‘ㆍ’를 없앨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몇 가지 이유를 들었으나 수긍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이 관철되어<국문연구 의정서>에서 ‘ㆍ’를 없애지 않기로 한 것은 옥의 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5제에 대한 이능화의 주장은 매우 독특하였다. 그는 ① ‘ㄱ ㄴ ㄹ ㅁ ㅂ ㅅ ㅇ’은 ‘常用初終聲字’로, ② ‘ㄷ ㅈ ㅊ ㅋ ㅌ ㅍ ㅎ’은 ‘活用初終聲字’로, ③ ‘ㆁ ㆆ ㅿ ㅱ ㅸ ㆄ ㅹ ㆅ’ 등은 ‘備考初終聲字’로 나누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①은 제한 없이 언제나 쓴다고 한 것을 보면 ②에는 어떤 제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그의 주장에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다. 주시경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주시경이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활약했음은 그의 연구안이 양으로 가장 많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주시경의 저서들이 전하기는 하지만, 그의 연구안은 국문에 관한 그의 연구를 종합한 것으로 그의 학문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의 연구안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그가 훈민정음의 制字 원리에 대해서 정면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은 사실이다(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이것을 볼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확고한 결론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이미 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국문에 대한 주시경의 주장은 ‘ㆍ’의 본래의 발음은 ‘ㅣ’와 ‘ㅡ’의 합음으로서 이것은 폐지해야 마땅하다는 것과, 된소리는 ‘ㄲ ㄸ ㅃ ㅆ ㅉ’로 표기해야 한다는 것과 받침으로 ‘ㄷ ㅈ ㅊ ㅋ ㅌ ㅍ ㅎ’ 등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 연구안에서 우리는 주시경의 새로운 받침 이론에 관한 가장 세련된 서술을 볼 수 있다. 모든 음은 ‘本音’ 외에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臨時의 音’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나라 말이든지 그 본음으로 적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즉 ‘찾고’에서 ‘ㅈ’이 제대로 발음되지 않으나 이것은 ‘임시의 자연한 音理’에 의한 것이며 이 경우 本音은 엄연히 ‘ㅈ’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ㅈ ㅊ ㅋ ㅌ ㅍ ㅎ’ 등의 받침을 쓰고 있는 것은 주로 주시경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그의 ‘본음’, ‘임시의 음’에 관한 이론이 그 뒤 우리 학계에서 잊혀지고 만 것은 애석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국어의 음운체계에 대한 매우 깊은 통찰에서 우러난 것으로 이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더라면 현대 국어학의 빛나는 업적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라. 권보상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될 때 내부 서기관이었다는 것 이외에 權輔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데 그는 국문연구소 개설 이래 충실한 위원으로 일했으며 그의 연구안은 23장의 짧은 것이기는 하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국문의 기원에 대해서 그는 ‘古篆’의 뜻을 매우 넓게 해석하였다. 즉 漢文, 梵字, 蒙文 등을 모방하고 이들을 일괄하여 고전이라고 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방이란 것은 ‘考察的 感念’을 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훈민정음은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독창적 문자체계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중성 ‘ㆍ’에 관한 권보상의 이론은 주로 어윤적과 이능화의 주장을 반박한 것인데, 매우 날카로운 데가 있다. 이 이론에서 우리는 그가 언어와 문자의 구별에 대한 명백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국어가 있은 뒤에 이것을 표기하기 위하여 국문이 생겼는데, ‘ㆍ’가 중성의 처음이라고 해서 이것이 모음의 근본이라 하는 것은 잘못임을 그는 밝혔다.

 받침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이론상으로는 모든 초성을 종성에 쓰는 것이 옳음을 분명히 하고, 그러나 이것을 일반화시킴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그가 특히 문법 교육이 필요함을 지적한 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타당한 것이다.

 된소리 표기를 된시옷으로 하자는 것을 빼고는, 권보상은 대체로 주시경과 의견이 일치했으나, 그는 이론적, 실제적으로 독자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특히 그가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언어와 문자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연구안의 다른 부분에서 드러나는 것이지만, 언어는 변화한다는 사실과 문자 표기는 보수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의 다른 학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 송기용

 宋綺用은 국문연구소 창설 이래 한 번도 연구안 제출을 게을리한 일이 없는 충실한 위원이었으나 독창적인 학설은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된소리 표기에 대해서는 주시경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고 ‘ㆍ’를 없애는 것도 옳지 않고 ‘=’를 만드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한 것은 이능화의 학설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받침 표기에 대해서도 대체로 주시경의 의견을 따랐으나 “隨機應用하자”고 한 점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바. 지석영

 <신정국문>당시의 지석영의 의견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의 의견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임을 특징으로 하여 어윤적이나 주시경과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대립을 보였다. 그의 주장은<의정안>에서 완전히 무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된소리 표기로 된시옷을 주장하면서, 지석영이 ‘ㅅㄱ’의 ‘ㅅ’은 본래 ‘ㅅ’이 아니라 한문에서 같은 글자를 생략할 때 쓰는 부호 ‘<’라고 한 것은 기발하지만 옳지 않은 착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 만든 ‘=’자에 대해서도 그의 설명은 너무나 빈약했다. 심지어 그는 그 용법이나 용례를 하나도 들지 않고 있다.

사. 이민응

 학부 서기관으로 나중에 국문연구소 간사와 위원을 겸했으며 국문연구소<보고서>도 李敏應의 글씨로 되어 있는데, 정작 그의 연구안은 제4제와 제5제 두 문제에 관한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내용을 보면 그는 지석영의 의견을 추종하고 있다.

아. 이돈구

 특별히 독창적이라고 할 만한 의견이 없다. 그는 주시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리하여 된소리 표기에 ‘ㄲ ㄸ ㅃ ㅆ ㅉ’을 쓸 것과 모든 초성을 종성으로 쓰기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ㆍ’에 대해서는 폐지하자는 설이 매우 타당하나 좀더 연구하여 본음을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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