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3. 한국사 연구
  • 2) 근대 한국사 인식의 추이
  • (1) 실학시대 후기에서 개항기의 역사학

(1) 실학시대 후기에서 개항기의 역사학

 실학시대에는 한국의 중세 역사학이 전환기를 맞았다. 私撰史書들이 풍부하게 간행된 것은 물론 그 내용도 다양하고 특색들이 있었다. 붕당으로 인해 정치와 학문이 서로 의존관계에 있었고, 당색에 따라서 역사를 보는 관점과 한국사의 인식체계 등이 상이했다. 역사서술의 형식적인 측면이 달라졌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363)이 점에 관해서는 이만열,<17∼18세기 史書와 古代史認識>(≪韓國史硏究≫10, 1974).

 먼저 실학시대에 나타난 역사서술 형식의 뚜렷한 점은 綱目體 형식의 역사서술이었다. 물론 編年體나 紀事本末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때 특히 많이 나타난 것은 주자와 그의 제자 趙師淵이≪資治通鑑綱目≫에서 시도한 강목체 서술이었다. 강목체 서술 형식은 실학시대에 유행처럼 나타난 역사서술의 형태였다고 할 것이다.

 강목체 형식과 함께 실학시대 역사학의 특징의 하나는 사론으로서의 正統論의 등장이라 할 것이다. 정통론 사론은 특히 李瀷과 安鼎福으로 계통지어지는 남인계의 학풍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이익이 馬韓正統論을 제시한 이래 남인계를 중심으로 정통론사학이 한때 풍미했다. 정통론사학은 특히 한국의 고대사를 체계화함에, 종전에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계통화하고 삼한을 위만조선에 부설해 왔던 고대사 인식체계에 변화를 가하여, 단군조선→기자조선→삼한으로 정통을 삼고 위만조선을 삼한에 대한 僭僞의 국가로 정리해 버렸다. 정통론자들은 삼한을 역사적인 정통국가로 설정하고 위만조선을 참위로 규정하는 데서 보이는 바와 같이, 역사는 정통과 참위를 준별하는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자 강목의 필법을 추종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통론 사학을 가능하게 했던 華夷觀에 변화가 오고 北伐論이 北學論으로 바뀌는 추세 속에서, 새로운 역사연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柳得恭의≪渤海考≫를 비롯하여 韓致奫(韓鎭書)의≪海東繹史≫, 李肯翊의≪燃藜室記述≫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역사의식의 변화와 관련이 깊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역사의식은 정통론 사학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발해사 연구가 한국사의 범주에서 논의되었을 뿐만 아니라, 李種徽의≪東史≫에서는 한국고대사의 체계가 단군의 주류가 부여·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새로운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기, 학파로서의 실학이 끝나는 것은 세도정치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세도정치의 등장으로 학문의 폐쇄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실학시대에 꽃피었던 역사의식은 위축되었고 역사서술 또한 활발하지 못했다. 그러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에는 과거의 전통성을 잇는 몇몇 역사 서술과 특수 분야에 관한 역사서술을 대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는 특별히 주목되는 바가 있다.

 19세기 전반기에 관심을 끈 사서로서는 丁若鏞의≪彊域考≫와 앞에서 언급한 한치윤(한진서)의≪해동역사≫로 알려져 있다. 이들 사서들은 18세기의≪동사강목≫등의 고증학적인 측면을 심화, 발전시키는 한편 정통론 사학을 차원높게 극복하고 있었다. 이들 사서들을 이어서 역시 19세기 전반기에 몇몇 사서들이 나타났다. 그 중 洪敬謨(1774∼1851)의≪大東掌攷≫의<歷代考>와≪叢史≫의<東史辨疑>는 19세기 전반기에 저술된 것이며, 그의 조부 洪良浩로부터 이어받은 家學적 전통 위에서 이뤄진 것이었다.<역대고>는 李萬運의≪紀年兒覽≫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지만, 군주편향적 시각이 강화되었다거나 정통론이 약화되어 있다는 점 등은 차이가 있다.<동사변의>는 사실 및 지리의 고증이 돋보이고 있는데, 그는 특히 한국 상고사에서 “이설이 분분한 28항의 문제들을 여러 문헌자료들을 비교하면서 밀도있게 고증”하였다.364)이 점에 관해서는 한영우,<19세기 전반기 洪敬謨의 歷史敍述>(≪韓國民族主義歷史學≫, 一潮閣, 1994).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李源益(1792∼1854)도≪東史約≫이라는 역사서술을 남겼다. 그는 서술원칙의 하나로 정통론을 고수하면서,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정통이 箕子를 거쳐 신라 문무왕 9년 이후와 고려 태조 19년 이후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삼한·삼국시대는 無統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정통론에 입각한 한국사 체계를 단군(정통)→기자(정통)→위만(僣國)→삼한(無統)→삼국(無統)→신라 문무왕 9년 이후(정통)→고려 태조 19년 이후(정통)→조선(정통)으로 정리했던 것이다. 이원익의≪동사약≫은 강목체적인 서술체제를 갖고 있긴 하지만, 고증사학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어서 강목법 사서와 고증적 사서의 중간적 형태에 속하는 사서로 지적되기도 한다.365)이원익의≪동사약≫에 대해서는 한영우,<19세기 중엽 李源益의 歷史敍述>(위의 책) 참조.

 19세기 중엽에는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술이 싹트기도 하였다. 종래의 사서들이 대부분 양반 식자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쓰여졌던 것과는 달리, 이 무렵에 이르면 향리나 서얼, 일반 시정인들의 전기류에 해당하는 책들이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향리의 역사를 쓴 李震興의≪掾曹龜鑑≫(1846)을 비롯하여, 서얼들의 역사를 쓴≪葵史≫(1858), 중인의 전기를 쓴 趙熙龍의≪壺山外記≫(1844) 등이 있는데, 이들은 “양반 아닌 중간신분층을 주제로 하는 사회사적 저술이었고, 자기가 소속된 신분층의 사회적 진출을 주장하는 현실개혁의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었고, 또 전기를 중요시하는 인간 중심의 서술이었고, 그리고 새로운 사료를 발굴 이용하고 있었다”고 지적된다.366)이 시기의 서얼과 향리 및 중인의 역사를 다룬≪葵史≫와≪掾曹龜鑑≫및≪壺山外記≫에 대해서는 이기백 교수의<19世紀 韓國史學의 새 樣相>(≪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1) 참조. 그 밖에 19세기 중엽에 간행된 사서로서는 劉在健의≪里鄕見聞錄≫(1862), 李慶民의≪熙朝軼事≫(1866), 朴周鍾의≪東國通志≫(地理考, 1868) 등이 있다.

 실학에서 개화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역사서술로서는 앞서 말한 몇 개의 사서와 함께 安鍾和(1860∼1924)를 빼 놓을 수 없다.367)최기영,<안종화>(조동걸·한영우·박찬승 엮음,≪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비평사, 1994).
韓永愚,<開化期 安鍾和의 歷史敍述>(≪韓國文化≫8, 1987).
―――, 앞의 책, 1994.
그는 개항 직후인 1878년에≪東史聚要≫를 완성하여 1904년에≪東史節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는데 이는 고려 말까지의 인물 800여 명을 다룬 것이다. 그는 이 저술에서 ‘근대화에 필요한 인간상의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였으며, 단군 중심의 고대사체계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주의사학이 성립될 수 있는 중요한 교량적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종화는 이어서 1909년에는≪國朝人物志≫를 간행하였는데, 조선시대의 인물 3,000명을 다룬 이 책은 일제의 한국병탄 계획이 노골화하던 시절, ‘조국사상이 油然하게 자생’토록 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국난을 이겨낸 전쟁영웅들과 왕조체제의 개혁을 모색한 조선후기 실학자들, 그리고 신분제의 질곡을 깨면서 새로운 개화세력으로 성장해 가던 위항인들, 그리고 도가나 처사를 자처하면서 이단사상을 키워 온 인사들을 부각”시켰다고 지적되고 있다.368)한영우, 위의 책, 338쪽. 따라서 인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정리한 안종화는 이런 일련의 역사편찬 작업에서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을 역사적 과제’로 ‘전통적인 성리학적 역사관을 부분적으로 벗어나’ 근대적 역사관으로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369)최기영, 앞의 글, 34쪽. 그러나 그의 책은 20세기에 들어서서 출간된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서 언급될 사서편찬보다 시기적으로도 앞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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