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3. 한국사 연구
  • 2) 근대 한국사 인식의 추이
  • (2) 개화기 계몽주의 역사학

(2) 개화기 계몽주의 역사학

 한국의 역사학에서 근대적인 성격을 부분적으로나마 띠고 나타나는 것은 갑오개혁 이후다. 개항 이래 외세의 침투를 경험하면서 내재적으로 수용, 축적하기 시작한 근대적인 의식-사회진화론·자강주의, 민족주의·제국주의 등-은 현실문제를 분석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능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한말 지식인들은 현실적으로 부닥친 위기의 타개 능력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말하자면 한국인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문화능력에서 그 타개책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의식과의 관련성이 엿보이기도 했다. 이 때 역사의식은 단순히 과거를 조망하는 것만이 아니고, 과거의 역사적인 경험이 나라의 미래를 전망하는 지혜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예언자적인 성격도 갖고 있었다. 한말 지식인들이 한국사에 새롭게 접근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려는 자세를 갖게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그랬던 만큼 이 시대의 역사학은 일정하게 역사연구의 방법과 서술면에서 전근대적인 것과 구별되는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한국에서 근대적 성격을 가진 역사학의 일차적인 특징은, 그 이전 봉건시대의 역사학과는 달리, 역사학의 학문적 독자성을 모색하는 한편 개성적인 민족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동양의 고·중세 사학이 經史一體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때의 역사학은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독립해 가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의 독자성은 먼저 경·사의 미분화에서 오는 역사학의 비독자적인 학문영역을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분리시키는 데서 시작되었지만, 더 나아가서는 과거 한국의 역사를 中華史의 일부 혹은 그 부용으로 취급해 오던 데서 이제 한국사를 중화사에서 독립시켜 독자적인 자기위치를 갖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근대 역사학은 역사인식 면에서는 사실의 실증을 위해 객관적인 사료비판과 논증을 중요시하고 인과관계를 분석적·종합적인 연구방법을 통해 규명하며,370)근대 역사학의 효시로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비판적 방법을 통하여 실증을 강조하고 철학적 역사를 극복하였으며, 역사주의적 방법론적 근거라 할 ‘본래 일어난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라는 명제 아래 역사의 개체와 그 발전을 시간적 과정에서 사실대로 탐구하려고 하였다(차하순,≪현대의 역사사상≫, 탐구당, 1994, 22쪽). 동양적인 과거지향적·순환론적인 역사이해를 강조하기보다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역사인식을 강조하는 편이다. 역사주체를 인식함에도, 고·중세의 역사학이 영웅과 지배자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서 근대역사학은 민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기에 근대역사학은 왕실이나 지배자 대신 민중을 강조하였다. 또 근대역사학은 이데올로기적 역사인식을 거부하기 때문에 한말 국사학도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정통론과 명분론 등 이념을 강조하던 교조주의적 역사서술을 점차 탈피하고,371)趙東杰,≪現代韓國史學史≫(나남출판, 1998), 64쪽. 과학적인 역사서술에 접근해 갔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소략하긴 하지만 근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먼저 나타나는 역사책은 갑오개혁 이후 학부에서 간행한 교과서류다.372)이 점과 관련,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金麗柒,<開化期國史敎科書를 통해서 본 歷史認識(Ⅰ)(Ⅱ)―歷史輯略을 중심으로―>(≪史學志≫14·16, 檀國大, 1982).
김흥수,<한말 역사교육 및 교과서에 관한 연구>(≪역사교육≫29, 역사교육연구회, 1981).
―――,<한말의 국사교과서 편찬>(≪역사교육≫33, 역사교육연구회, 1983).
이경란,<구한말 국사교과서의 몰주체성과 제국주의>(≪역사비평≫15, 역사비평사, 1991).
이연복,<우리나라 근대역사교육사연구-구한국의 역사교육을 중심으로->(≪서울교육대학논문집≫11, 서울교육대, 1978).
조 광,<개항기의 역사인식과 역사서술>(≪한국사≫23, 한길사, 1994).
조동걸,<한말 사서와 그의 계몽주의적 허실>상(≪한국독립운동사연구≫1, 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 1987).
―――,<한말 사서와 그의 계몽주의적 허실>하(≪한국학논총≫10,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7;≪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9)에 재수록.
홍영백,<한말 세계사 관계사서의 내용과 그 한계>(≪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태학사, 1984).
홍이섭,<구한말 국사교육과 민족의식>(≪인문과학≫36, 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 1974).
朴杰淳,≪韓國近代史學史硏究≫(國學資料院, 1998).
1895년에 各級學校令이 반포되고 서울에서만 壯洞·정동·계동·廟洞 학교가 설립되면서 ‘본국사’가 교육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학부는 국사교과서 편집을 시작하여 1895년에는≪朝鮮歷史≫·≪朝鮮歷代史略≫·≪朝鮮略史≫를, 1899년에는≪東國歷代史略≫·≪大韓歷代史略≫·≪普通敎科東國史略≫을, 1906년에는≪普通敎科大東歷史略≫·≪新訂東國歷史≫·≪中等敎科東國史略≫을, 그리고 1908년 이후 한말에는≪대한력 상≫·≪初等本國歷史≫와≪초등대한력≫·≪初等大韓歷史≫·≪初等大東歷史≫와≪初等本國略史≫·≪初等本國歷史≫·≪新撰初等歷史≫·≪國朝史≫를 간행하였다.373)한말의 自國史 교과서에 대해서는 조동걸, 위의 글(1987).
朴杰淳, 앞의 책, 27∼53쪽 참조.

 이들 교과서들은 실학정신을 계승하면서 ‘자존적 국가의식’을 바탕으로 ‘부국강병·萬邦對峙·근대주의·보편적 세계사·우승열패’의 개화사상의 역사의식374)朴杰淳, 위의 책, 27∼32쪽.을 담고 있다. 초기에 국한문 혹은 한문으로 쓰여졌던 이들 교과서들은 뒤에 차차 국문을 전용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편년체적 서술을 유지하였으며, 고대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때로는 정통론을 고집하는 것도 있어서 근대적 성격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있었다. 근대의 서술에 인색한 것은 당대사 서술에 소홀했다는 측면과 함께 과거회귀적인 역사의식을 엿보게 한다. 고대사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의 예를 벗어나지 못한 서술이나 근대의 서술에서 淸으로부터의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한 것은 이 책들이 갖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학부 편찬의 역사책은 당시 학부 편집부에 있던 玄采나 金澤榮 등이 맡았으나 뒷날에는 차차 개인적인 저술로 확대되었다. 1906년에 나온 교과서는 ‘國民敎育會’, 元泳義·柳瑾, 현채 등의 저자들이 썼다. 비록 내용과 형식면에서 어설픈 측면이 있고 그래서 동시대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긴 하였지만,375)특히 신채호는 한말의 교과서류를 두고, ‘新史의 體’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그것이 서술의 편명, 술어를 고치는 정도였기 때문에 “털어놓고 말하자면 韓裝冊을 洋裝冊으로 고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신채호,≪朝鮮上古史≫;≪丹齋申采浩全集≫上, 형설출판사, 1977, 61쪽). 이들 교과서들은 당시 개화의 풍조를 소화해 가는 과정에서 젊은이들로 하여금 自國史를 새로운 방식으로 인식케 하는 하나의 가교를 놓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말 자국사의 인식과 연구는 먼저 고전을 복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개화가 실학사상의 내재적인 발전과 계승이라는 측면을 갖고 있었던 만큼 한말에는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완당 김정희의 영향이 컸고 그들에 대한 연구열 또한 높았다. 실학자들의 저술이 복간되고 거기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었다. 이 때≪연암집≫을 비롯하여 다산의≪목민심서≫·≪흠흠신서≫·≪아언각비≫등이 복간되었고, 張志淵은 다산의≪아방강역고≫를 증보, 개정하여≪대한강역고≫로 편찬하였다. 복간사업은 崔南善이 설립한 朝鮮光文會를 통해 활발히 전개되었다.376)조선광문회의 복간사업에 대해서는 이만열,≪韓國近代歷史學의 理解≫(文學과知性社, 1981), 125∼129쪽 참조.

 한말 안으로는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이 가중되는 시기에 지식인들의 역사의식은 교과서를 편찬하는 외에 자기역사를 새롭게 인식하고 자기시대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나타났다. 通史類로서 대표적인 것은 崔景煥·鄭喬의≪大東歷史≫377)≪大東歷史≫에 대해서는, 필자는 최경환·정교 두 사람이 써서 1896년경부터 독립협회 회원들의 일종의 교과서로 사용하다가 뒤에 1905년에 출판한 것으로 보았으나, 조동걸 교수는 이 책을 ‘두 사람의 공저’로 보면서도 ‘정교의≪大東歷史≫가 따로 있으므로 편의상’ 분리해서 보았다(조동걸, 앞의 글, 1989, 169∼175쪽·181쪽. 이만열, 앞의 책, 121쪽 참조).와 김택영의≪歷史輯略≫, 현채의≪東國史略≫을 들 수 있다. 시대사의 성격을 띤 것으로 한말 자기 시대의 풍운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는 黃玹의≪梅泉野錄≫과 개화파 인사로서 독립협회 회원이기도 했던 정교의≪大韓季年史≫등이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개화파 지식인이 편찬한 우리 나라 통사에 이미 일본의 한국사 연구가 상당 부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대동역사≫는 신라 박혁거세 9년조에서 일본의 러시아정벌(러일전쟁)을 언급하고 한일관계를 엉뚱하게 ‘同文同種之國’으로 또 ‘脣齒輔車之勢’로 설명하여,378)≪大東歷史≫新羅 始祖王 九年 大皇帝陛下光武七(八)年 日本征露國…皆克之 蓋我大韓之與日本爲同文同種之國 壤地相接脣齒輔車之勢…. 역사인식 및 시대의식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이 책이 독립협회의 교과서로 채용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러한 한계는 결국 독립협회의 역사의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현채의≪동국사략≫이 일본인 하야시(林泰輔)의≪朝鮮史≫를 편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다소 수정해서 수용했다 하더라도, 그 한계는 너무나 뻔한 것이다.379)현채의≪東國史略≫에 대해서는 이만열, 앞의 책, 123∼124쪽 참조. 여기에다 김택영의≪역사집략≫은 하야시의≪조선사≫에서처럼 단군의 역사를 佛家의 所出인양 의심한 것이라든지 신공왕후의 신라정복과 任那日本府說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어서 이미 같은 시대의 신채호 같은 이들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380)신채호, 앞의 책, 57∼58쪽 참조. 신채호는 여기서 장지연의≪大韓彊域考≫도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시대사의 성격을 띤 것으로≪매천야록≫과≪대한계년사≫등을 거론한 바 있다. 전자는 한말 우국시인이며 지리산 밑 구례에서 17년간이나 일본인 침략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국운을 걱정했던 황현이 유교사관의 근간이 되는 통감강목·춘추필법에 기초를 두고 근대사의 현실에도 유의하면서 당대사를 서술했던 것이다. 후자는 황현과는 달리 독립협회 회원으로 회원에게 국사를 가르치기 위하여≪대동력사≫를 교열·저술한 적이 있는 정교가 쇠약해 가는 조국을 보면서 침략세력에 대한 항거에 역점을 두고 붓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책에 나타난 두 지식인의 역사의식은 일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81)한말의 역사인식과 역사의식에 대해서는 鄭昌烈,<韓末의 歷史認識>(≪韓國史學史의 硏究≫한국사연구회편, 을유문화사, 1985), 189∼228쪽 참조.

 이렇게 근대적인 것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전통과의 괴리에서 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데다가, 후술할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이 밀려오고 있는 데도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朴殷植과 申采浩 같은 강렬한 역사의식을 가진 역사가를 만났다는 것은 그 시대의 한국의 지성계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시대가 갖는 봉건적인 모순을 의식하는 한편 밖에서부터 밀려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은 이들의 역사의식을 통해 건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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