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3. 한국사 연구
  • 3) 민족주의 사학의 성립
  • (1)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침투

(1)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침투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이란, 일제가 한국을 침략, 강점하고 그것을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하여 안출한 역사학을 총칭해서 말한다. 여기에는 일제 어용학자들의 주장이 대부분이지만, 국적에 관계없이 일제의 침략 정당화에 가세한 역사학은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일제 식민주의 사학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된 것이 있지만382)金容燮,<日帝官學者들의 韓國史觀>(≪思想界≫, 1963. 2).
―――,<日本·韓國에 있어서의 韓國史敍述>(≪歷史學報≫31, 1966).
洪以燮,<植民地的 史觀의 克服>(≪亞細亞≫, 1969).
李萬烈,<日帝官學者들의 植民主義史觀>(앞의 책, 1981).
―――,<19世紀末 日本의 韓國史硏究>(≪淸日戰爭과 韓日關係≫, 韓國史硏究會편, 一潮閣, 1985).
趙東杰,<植民史學의 성립과정과 近代史敍述>(≪韓國民族主義의 發展과 獨立運動史硏究≫, 知識産業社, 1993).
, 그것이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성립에 일정하게 자극과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여기서 잠시 언급한다. 한말·일제하에 성립된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식민주의 사학을 비판, 극복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출발한 일면을 갖고 있다.

 에도(江戶)시대에 시작된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메이지(明治)시대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입수하여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본격화되었다. 1883년에 광개토대왕 비문을 입수한 일본의 참모본부는 이 비문을 해독하기 위해 저명한 한학자·역사학자들을 동원, 1889년에 책임자 요코이 타다나오(橫井忠直) 의 이름으로 ‘고구려비출토기’를 발표하였다. 이 글은 일본 사학계에 큰 반응을 일으켜 침략주의적인 관점에서 고대 한일관계사를 다루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4세기 말의 광개토왕 무렵부터 倭가 신라·백제를 정복하고 고구려와 대결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야마도(大和)정권을 수립했다는 것과 이러한 사실이 고구려의 금석문에 의해서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욱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일본이 한국에 출병하여 남하하는 고구려의 대군과 투쟁, 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제가 추구하는 현실의 대륙정책과 실로 잘 부합되는 것이었다.383)旗田巍,≪日本人의 韓國觀≫(李基東 譯, 一潮閣, 1985), 126쪽.

 이 무렵 참모본부가 아닌 일본의 근대 역사학에서도 한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1877년에 설립된 동경제국대학은 1889년 사학회를 결성하고 그 기관지로서≪史學會雜誌≫(1892년에 史學雜誌로 개칭됨)를 간행하면서 근대적 학문연구 방법을 내세워 일본사는 물론 동양사와 그 일부로서 한국사 연구도 진행시켰다. 이렇게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그들의 한국 진출에 발맞춰 대학과 군대에서 각각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1894년을 분기점으로 그 전 시기에는 주로 고대사를 중심으로 정치·군사적인 관점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후에는 근대사에 사회경제적인 관점이 중시되었다. 청일전쟁 전에 그들이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명분을 찾기에는 고대사의 연구가 필요했고, 청일전쟁 후에는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 실천에 필요한 역사이해가 절실히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침략에 필요한 현실적인 역사 연구는 고대사가 아니라 근대사였고, 사회경제사였다.384)1894년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의 한국사 연구의 경향이 변화되고 있는 점과 그 이유에 대해 이만열, 앞의 글(1985)은 당시 발표된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과 저서들에 관해서도 언급해 놓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뒷날 식민주의 사학의 기본골격의 하나인 소위 停滯性이론이 타율성이론 및 일선동조론의 등장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이론화되는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무시한 정체성이론385)이 점에 관해서는 강진철,<日帝官學者가 본 韓國史의 停滯性과 그 理論>(≪韓國史學≫7,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참조.은 1902년 한국을 시찰한 후쿠다(福田德三)가 1903∼04년에<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를 발표하면서 본격화된다.386)이 논문은 처음에≪內外論叢≫에 게재되었고, 1907년에≪經濟學硏究≫에 수록하였으며, 다시 改稿하여 1915년판≪經濟學硏究≫前篇에 수록하였다. 한국의 역사는 수많은 정치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면에서는 발전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 정체성론의 요지로서, 후쿠다는 이러한 “부패·쇠망의 극치에 달한 (한국의) 민족적 특성을 근저에서 소멸시켜” 일본에 동화시킬 자연적 命運과 의무를 갖는 중대한 사명을 일본이 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논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하겠는데, 이 점은 바로 일제 어용학자들이 일제의 한국 지배의 정당성을 러일전쟁에 앞서 주장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었다.

 정체성사관의 연원으로 불려지는 이 논문은 일본의 한국 진출이 식민지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봉건제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한국을 근대사회로 발전시켜 주는 데에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뒤 이 이론은 여러 일제 관학자들(河合弘民·山路愛人·喜田貞吉·黑正巖·四方博·森谷克己)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론으로 되었고 해방 후 오늘날까지 한일관계에서 ‘傳家의 寶刀’처럼 그들의 식민수탈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정체성사관이 등장한 직후에 타율성이론의 모태인 滿鮮史觀이 나타난다.387)만선사관 및 타율성사관에 대해서는 旗田巍,<滿鮮史의 虛像>(≪日本人의 韓國觀≫), 188쪽.
李龍範,<韓國史의 他律性論 批判>(≪亞細亞≫1969년 3월호).
이만열, 앞의 책(1981), 276∼279쪽 참조.
이는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조선사와 하나의 체계로 묶으려는 것으로 일제의 중국 침략에 앞서 동양사학자들이 안출한 것이다. 그들은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켜 중국이 만주에 대한 영토권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그 논거를 제시하려고 하였다. ‘만선’이란 말도 러일전쟁 후에 설립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동경지사 내에 ‘만선역사지리조사실’을 만들고 거기서 ‘만선역사지리보고서’(16책)를 간행하는 데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만선사’는 그 체계에서부터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한편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국가들이 한반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타율성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타율성사관은 한국사가 한국인의 자율적인 결단에 의해 전개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으로, 거기에 의하면 한국사는 웅건한 자주독립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외세에 굴종하는 비겁한 역사뿐이었다. 한국의 역사는 시작에서부터 기자·위만과 같은 외세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대신 수·당과 대결하며 동북아시아에서 그 자웅을 가리던 웅혼한 고구려사는 간 데 없고 왜소하기 짝이 없는 나약한 역사만 남게 되었다. 독립자주의 상징으로 일찍부터 존숭되어 온 단군은 신화로서 취급되어 우리 역사의 영역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한국이 일제와 같은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한국사를 지배해 온 타율적 역사전개의 당연한 결과로 보였다. 외세의존적인 한국사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의타적·사대적인 민족성을 갖게 만들었다는 주장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사관의 하나로 등장한 日鮮同祖論은 일선동종론·일한일역론·일선동원론 등으로도 불려지는데, 한마디로 일본과 한국은 같은 조상, 같은 민족, 같은 영토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일제의 한국 강점을 침략이 아니라 동조·동종의 옛 역사로 환원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치되며 따라서 그들의 침략행위를 호도·은폐시키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처음에는 일제의 한국 강점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으나, 3·1운동 이후에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저해하는 이론으로 둔갑하였다. 나아가 일선동조론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사상적 기저로서 원용되었고, 일제 말기에는 신사참배나 창씨개명 등의 민족말살책으로 한국민의 민족적 자존심을 크게 훼손하는 극단적 정책으로 이어졌다.

 한말·일제 강점기에 안출된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형성·발전과정은 여기서 상론하지 않겠다.388)식민주의사관의 형성·발전 및 그 내용에 대해서는 강진철·김용섭·이용범·이만열 및 하타다(旗田巍)의 앞의 글들을 참조. 다만 식민주의 사관으로 한국의 역사가 크게 훼손당해 민족정신이 파괴되어 갈 때, 여기에 자극을 받아 민족자주성과 국권 회복이 바로 민족사를 되찾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민족사 연구를 민족주의운동과 결부시킨 일련의 역사학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은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이 근대민족주의 사학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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