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1. 근대 문학의 발전
  • 3) 개화기의 서사 장르
  • (3) 토론체 소설

(3) 토론체 소설

 개화기에는 신문, 잡지들의 발간이 활발하였다. 개화기의 신문, 잡지들은 주로 개화기의 시대상을 반영한 애국 사상과 개화 사상을 그 지면에 게재했는데, 그렇게 게재된 글의 형태의 태반이 논설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다른 시기의 신문·잡지에 비해 더 우세하게 그 지면의 중심부를 논설쪽에 배당한 개화기의 신문·잡지들은 논설쪽이 감당하기 어려운 감응력을 끌어내기 위하여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화기의 신문, 잡지들이 모색해 낸 그 새로운 방안들이 ‘사회등’ 가사, 민요 개작 같은 율문 작품들을 게재하는 것이었으며, 시사적인 토론체의 글을 게재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신문, 잡지들에 실린 것들 중에는 시사 토론문의 형태에 그대로 머무른 글들도 있고 문학적인 인식과 意匠의 도움으로 토론체 소설로 분류하기에 별로 손색이 없는 것들도 있다. 이 경우, 토론체 소설이라는 범주에는 시사 토론문에서 소설로 상승했다고 할 만한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거부오’·‘유종’ 같은 작품들과 흔히 ‘몽유록계 소설’로 분류되는 ‘夢見諸葛亮’·‘디구셩미몽’·‘동물 우화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는 ‘금슈회의록’·‘경세종’ 같은 작품들을 모두 망라하는 방법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몽유록계 소설’은 꿈이라는 특별한 의장을 활용하고 있으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토론을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그렇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 우화 소설’의 우화 구조 역시 그 구조를 필요로 했던 것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423)‘몽유록계 소설’들을 넓게 토론체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본 것은 개화기의 이 유형의 작품들이 전대의 몽유록계 소설, 예를 들면 ‘구운몽’처럼 파란만장한 주인공의 일대기를 포용하는 구조로 사용되지 않은 채, 현실에서 만나기 어려운 인물을 만나 토론을 전개하는 구조로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물 우화 소설’의 경우 또한 인간 문제의 토론 주체들을 동물들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주체를 바꾼 토론체 소설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조남현은 아래의 글에서 개화기 소설 양식의 변이 형태, 곧 토론체 소설·몽유록계 소설·동물 우화 소설들을 점검하면서 이 작품들의 분류를 끝내 보류하였다. 그러한 신중한 태도와 함께 그는 “개화기 서사양식의 일종이며 개화기 소설양식의 變異態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눈에 두드러지게 ‘계몽적인 형태’에 경사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견해를 결말에 덧붙여 놓았다. 이 글에서 필자가 그 ‘변이 형태’의 작품들을 토론체 소설로 묶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도 그 형태의 작품들이 계몽적인 형태에 기울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조남현 ‘개화기 소설양식의 변이현상’,≪개화기문학의 재인식-근대문학연구·1≫, 지학사, 1987).

 위에서 살펴 온 바와 같이 개화기는 격동의 시대였으며, 그 시대를 반영하는 개화기의 문학 역시 격동의 문학이었다. 개화기 문학의 그러한 격동하는 양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데, 그 시대의 과제에 대한 대응 방식, 그 대응 방식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때에 전통의 지속과 변화에 따라 채택하게 된 작품의 형태와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문체의 선택이 그것들이다. 이 세 갈래의 개화기 문학의 특징적인 양상들은 이 글의 앞 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작가쪽의 출신 성분 및 그가 형성해 가졌던 의식에 깊이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개화기 문학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이 시기의 문학 논의에 있어 유의할 점들 몇 가지를 적어 두기로 한다. 첫째, 개화기 문학을 과도기의 문학으로 이해하는 종전의 시각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점이다. 개화기 문학이 한국 문학사가 겪었던 미증유의 대전환기의 문학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과도기의 문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이후에 전개된 문학의 완성도를 과대하게 또는 부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시기 문학을 가리키는 명칭에 대한 문제이다. 이 시기 문학의 명칭으로서 ‘개화기 문학’이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주 거론되는 ‘애국계몽기 문학’이란 명칭이 모든 난점을 해결하는, 새로 채택할 만한 명칭인가 하면 그렇지도 못한 듯하다. 애국 계몽기 문학이란 명칭으로 이 시대의 문학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그렇지 못한 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화기 문학’이란 명칭이 비록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문제점을 인식한 채 이 명칭의 변경을 지나치게 서두르지 않는 것이 온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시기에는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문명 개화 지향의 문학만이 존재했었던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헤쳐 나가려던 자보 지향의 문학이 엄존했었다는 사실이다. 개화기의 뒤를 이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문학에 있어서의 이 자보적인 문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맥락을 잘라 버렸다. 그 까닭에 우리는 광복 이후의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이 자보적인 문학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지경이었으니, 그것을 계승·발전시키는 작업은 염두에조차 둘 수 없었다. 그 자보적인 문학의 발굴·소개·평가가 어느 정도 진행된 오늘에 있어 우리는 개화기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대하면서 그것들을 바르게 평가·이해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작업에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權五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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