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2. 근대 예술의 발전
  • 1) 음악
  • (2) 근대음악사의 전개

가. 제1기

 근대음악사 전기 제1기는 음악사회가 민족음악으로서 자각과 실천을 전개하는 1860년부터 1876년 개항까지 17년간의 음악사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 이전의 시기와 크게 달랐다. 하나는 안으로 국가권력의 본질을 이룬 토지소유원리와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세계 제국주의의 출현에 의한 민족국가가 위기에 직면한 시기이었다. 제1기는 1862년부터 전국 70여 개 지역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나 매년 지속되다가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신분제적 토지소유원리의 모순과 그 성리학적 정치체제의 통치이념이 급속히 와해되는 시기이었다. 또한 조선은 19세기 60년대에 대외적인 충격으로 민족적 위기감이 휩싸인 시기이었다. 1860년에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간에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반식민지화로 전락되고, 조선 역시 제국주의의 이양선 출몰로 더 이상 세계질서의 예외지역이 아니었음이 민족적 현실이었다. 1866년의 조불전쟁과 1867년의 조미전쟁과 같이 민족국가의 위기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가) 기층민중들의 새로운 음악전개

 농민들은 봉건지배체제에 대한 저항 등 사회체제를 비판하는 노래들을 이 기간부터 조직적으로 만들어 유포하였다. 1861년 경상도 단성에서 “丹城이 哭聲이 되었네”와 比安에서 “참관이 거관하니 비안이 불안하네”와 같은 저항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노래들은 모두 봉건적 조세수탈과 지대수탈 세력에 대한 저항의 노래이다. 또<居昌歌>가 1862년 농민들의 조직적인 항쟁을 예고하며 불려지고 있었다. 1865년 경복궁 중건시<경복궁타령>이 기층민중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지면서 지배층의 수탈현실과 고통받고 있는 기층민중의 징발과 경제수탈을 음악적으로 비판한다. 이 현장에 동원된 예인집단, 곧 무동패·중광대패·광대패·초막산민·선소리패 등이 공연하였다. 또 1861년 동학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마다 ‘북을 치고 나발을 부는’ 풍물이 항쟁의 음악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신청출신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다른 곳으로 회피’하는 것도 모두 조선시대의 수취제도의 모순에서 나왔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연명하여 신분제도의 철폐를 제기하거나, ‘전주 통인청 대사습’을 통하여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하였다.

 신청(재인청)출신과 농민출신으로 고향을 등진 떠돌이 예인집단들이나 그 밖의 붙박이 예인집단들도 鄕市의 발달에 따라 도시의 상설 무대로 진출하여 상주하려는 변화가 일어났다. 전국 1,061개의 鄕市 가운데 최대 시장이었던 송파에서는 산대를 상설화하여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는 계기로 삼았고, 그 계기를 다른 예인집단에게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중반 이후의 전국에 걸쳐 있는 5광대와 들놀음(野遊)패는 물론이고 신청이 참여한 각종 연행과 의식이 관아의 제당·동헌·객사 등지에 진출하여 공연되었다.

 격상된 예술적 지위만큼이나 기층민중 출신들의 예술가들에 대해 새로운 역사평가를 시도하는 것도 이 시기의 변화된 역사인식이었다. 이미 1844년 趙熙龍의≪壺山外記≫뿐만 아니라, 1862년 직하시사 출신 劉在建의≪里鄕見聞錄≫은 308명의 이향인들 중에 음악인들을 평가하였다. 퉁소·비파·거문고 연주자이자 창작가(김성기 新譜)로 활동한 천민출신의 金聖基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또 1866년에 직하시사 출신의 李慶民의≪熙朝跌事≫도 김성기와 함께 생황 연주의 임희지를 평가하였다.

나) 중인들의 중개성과 새로운 양상

 앞서의 유재건과 이경민은 중인출신들로서 기록을 남긴 것은 성리학적 문화권에 대한 중개성이었다. 5광대와 들놀음, 또 떠돌이 예인집단과 신청출신들의 광대나 악공들의 연행을 관아로 끌어들여 사대부의 가족들까지 참여시킨 것도 후견인 역할을 한 중인들이었다. 이들은 수탈자로서 규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신들에게만 책임지울 수 없으므로 지배층과 연결시켜 이득을 취하려는 데서 그 중개성이 가능했다. 또 ‘전주 통인청 대사습’ 역시 중인들로 구성된 통인청이 신청출신들을 관장하여 그 음악문화를 사대부로 중개하고 있었다. 중인출신으로 향아전이었던 申在孝가 비록 기층민중들의 비판적 풍자성으로 가득한 판소리를 떠나서 안동 김씨와 대원군 정권의 보호를 받으며 진채선과 허금파 등의 여류 명창 후견인 역할을 하며 판소리 개작을 한 것도 권력층에의 중개성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선혜청과 병조는 물론 호조·내수사의 서리 등 경아전들이 악공들을 불러내어 풍악을 크게 개최하는 양상은 조선 후기 이래의 흐름이지만, 이 시기에 후견인 역할이 더욱 부각되어 있었다. 특히 제1기 이후 서울이 소비적·향락적 도시로 변해 가면서 한문문화권에 일찍부터 편입된 중인출신들이 18세기 이래로 詩會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며 개화사상가로 진출한다. 1870년대 말 청계천의 광교를 중심으로 六橋詩社를 결성하였고, 1876년에는 박효관과 안민영의≪가곡원류≫가 나왔다. 이 가곡집엔 김윤석과 하규일 등이 참여하였고, 때로는 인왕산 근처에 필운대라는 歌臺에 올라 가곡을 불렀다.

다) 제국주의 침략과 음악 대응

 밖으로부터 서양제국주의의 이양선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1860년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북경을 점령하여 청나라를 굴복시키자 조선은 불안에 휩싸인다. 안으로는 왕권 쇠약, 정치기강의 문란, 삼정 문란을 비롯하여 국가재정원인 세원이 파탄으로 이어지면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사회적 불안이 커졌다. 천주교가 西學의 하나이었기 때문에 이를 대응하려는 東學이 1860년에 창도되면서 전국의 기층민중들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밖으로 서학에 맞서고 안으로 봉건체제를 일신하기 위한 동학은 그들의 신앙가사인 ‘동학가사’로 근대화를 모색한다. 1860년부터 1863년 사이에 만들어진 동학의 신앙가사집인≪용담유사≫가 기존의 민요에 ‘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나 ‘즉흥적으로 얹혀 부르기’로 불려진다. 특히<칼노래>는<칼춤>을 추며 불렀다. 국가는 이 노래와 춤을 반체제의 노래와 춤으로 규정하고 1864년 崔濟愚(1824∼1864)를 처형시켰다. 또 1876년 전라도 장흥에서 李中銓(1825∼1893)은<장한가>라는 유교가사를 만들어 불렀고, 1866년에 서장관으로 북경을 다녀온 洪淳學(1842∼1892)은<연행가>를 만들었으며, 신재효는<괘심하다 서양 되놈>이란 단가를 만들어 각각 서양을 비판한다. 다른 한편으로 서양음악을 실학자이자 改新樂學者들을 중심으로 자주적으로 발전시킨다. 서양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1631년부터였다.426)노동은,≪한국근대음악사≫Ⅰ, 347·361쪽. 제1기 이전인 약 2백여년 전부터 정두원·김창업·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정약용·이규경·서유구 등이 서양음악을 조선의 문화체계로 소개한다. 서유구는 서양음악을 ‘彼音’으로, 19세기의 이규경은 ‘西音’, 후에 ‘西樂’-‘洋樂’-‘音樂’으로 되었다. 이미 18세기 중반 이후 홍대용이 양금(洋琴, dulcimer)을 들여와 율관 제도의 대안악기로 통용시켰고, 19세기 전반기에 自鳴琴(musical box)이 들어와 양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제1기 기간에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들 중심으로<성 시메온 송가>·<떼 데움>·<알렐루야>·<아베 마리아>등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평균율에 의한 성가들이 불려졌다. 또 최양업 신부가 기존 민요에 신앙가사를 얹혀 부르는 ‘천주가사’도 광범위하게 불렸다. 이 시기에 崔漢綺(1803∼1877)가 서양의 음향학을 비롯하여 음악과학적인 이론체계인 ‘音樂氣學’체계를 확립하고 자주적이면서 개방성을 가진 민족음악으로 발전시켜 서양제국에 대응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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