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2. 근대 예술의 발전
  • 2) 미술

2) 미술

 근대적 현상을 내재적 요인에 의한 개화로 보느냐 외부로부터의 이식과 자극에 의한 변화의 양태로 보느냐는 견해에 따라 근대의 시점이 상향되기도 하고 하향되기도 한다. 내재적 요인에 의한 개화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시점은 조선 후기인 영, 정시대로 그 상향이 조정될 수 있으며, 외부적 충격과 자극에 의한 견해를 따른다면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통한 개항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을 거처 1897년 대한제국 선포에 이르는 문호개방의 시기인 개화기가 근대의 시점으로 설정될 수 있다.

 근대적 자각현상을 전적으로 내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주체적 입장이란 명분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자칫 국수적인 맹목에 빠질 위험이 있으며, 외부적 충격에 의한 것이 라고 보는 입장은 근대를 서구중심적인 역사전개의 양상으로 보려는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면이 있다. 우리의 근대는 내부적 자각의 요인도 전혀 없지 않으며 동시에 외부적 충격에 의한 자극적 요인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두 주장은 배타적이기보다 상호보완을 통한 종합의 차원에서 보아야 진정한 우리의 근대적 양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18세기부터 전통화단에는 적지 않은 새로운 현상들이 포착되는데, 그것은 내부적인 변화와 동시에 외부적인 영향의 두 갈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수용층의 변화가 현저해지고 있다.

 지배계층에 눌려 있던 서민계층이 예술의 새로운 담당층으로 급부상함을 목격하게 된다. 서민문학과 서민미술의 유행은 서민사회의 위상이 그만큼 향상되었음을 시사한다. 서민예술의 대표격은 民畵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고 민화란 형식은 있게 마련이지만 조선 후기의 민화의 성행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 단연 독특하다는 점에서 그 유례를 다른데서 찾을 수 없게 한다.

 민화란 글자 그대로 민간사회에서 통용되었던 그림이다. 수용층은 말할 나위도 없이 제작담당자도 서민층의 아마추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미술은 특수층인 지배계급의 독점적인 향유물이었다. 서민계급이 미술작품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자각과 의식의 변모를 시사하는 것이다. 서민문학과 서민예술의 부상은 조선 후기사회의 내부적 변화를 말해주는 것으로 근대적 자각현상이 내부로부터 이루어졌다는 주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민화의 내용은 전통회화의 화목을 모방한 것도 없지 않으나 순수하게 민간의 생활감정을 담은 것이 적지 않은 편이다. 서민의 꿈과 생활의 안락을 기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민화는 그 내용의 분류에 있어 20가지가 넘는 종별과 일정한 체계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의 형성 내역을 짐작케 한다. 아마추어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형식에 있어서 치졸한 면이 적지 않으나 바로 이 같은 소박한 형식이 민화가 갖는 특성이며 기교에 병든 전문회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한 매력을 지닌다.

 전통회화에서의 독특한 현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眞景山水의 등장이다. 진경은 실지의 자연경계를 실사하는 형식의 그림으로 오늘날의 사경산수 또는 실경산수에 해당된다. 우리 나라가 중국에서 볼 때 동쪽에 있다고 해서 東國眞景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당시의 전통화단에 관념적인 틀의 산수가 아닌, 실제 주변을 모델로 그렸다는 것은 대단한 파격이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변화의 추이는 물론 미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효종, 숙종대를 지나 영조, 정조대에 오면서 자생적인 문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 있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유입되어 오던 문화의 전파에 있어 문제가 파생했다는 것을 뜻한다. 병자호란을 거친 후 한반도와 중원의 관계가 한동안 냉각기에 있었다는 것이 중원으로부터의 문화유입을 차단하게 된 요인으로 꼽힌다. 외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자생적인 문화가 융성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일급 예술가들인 謙齋 鄭敾과 檀園 金弘道 등이 지금까지 눈을 주지 않았던 주변의 자연을 모델로한 그림을 그리면서 이에 자극받은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진경산수가 전통화단의 중심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산수의 대상은 주로 금강산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도봉, 인왕 등 전국의 명산이 포함된다. 서민예술형식인 민화의 발흥이 서민계층의 생활에 대한 애착의 발로라고 한다면 전통화단의 진경산수의 진작은 자신의 주변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의 발견이라고 하겠다. 중국에서 전래된 관념적 산수에만 얽매여 있던 화가들이 실제의 자연을 대상으로 그리게 되었다는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신선함 못지 않게 실지의 자연을 그리는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예컨대 겸재가 금강산을 그리는데 암벽의 특징에 따른 준법을 개발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진경에 못지 않게 俗畵의 성행도 눈길을 끈다. 속화는 풍속도를 말하는 것이면서 서민들의 생활풍속을 주 모티브로 다루었다는 데서 비속하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서민들의 생활양상이 그림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서민들 스스로에 의한 자신들의 생활에의 애착과 더불어 이를 지켜 보는 사람들에게도 반영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문화의 주도층인 사대부계층과는 별도로 閭巷文人들에 의한 새로운 문화담당층이 형성된 것은 이와 관련있다. 기술잡직, 하급행정실무 등 미관말직의 관인들에 의한 문화계의 주도적 활동은 전반적으로 조선 후기문화의 질적, 형식적 변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미 18세기에는 중국 북경을 통한 서양의 문물에 대한 접근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李瀷의 저술에서 근년에 燕行使로 갔다 온 사람 중에 서구화를 갖고 온 것이 많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당대 중국사행원들에 의한 서구문물에의 접근이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연행사신이나 수행원들이 남긴 견문록-洪大容·朴趾源·金昌業·金景善-에 서양문물에 접한 구체적인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천주당의 견학이나 거기 그려진 서양화법의 벽화에 대한 소견들이 흔히 보인다. 서양화의 사실적인 묘법에 대한 감탄과 과학적인 원근법, 명암법 등이 기술되고 있다.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昭顯世子가 환국하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Joannes Adam Shall von Bell)로부터 성화와 성물들을 선물받아 온 사실이나 李承薰을 비롯한 연행인사들에 의해 구입되어 온 성화가 상당수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적어도 18세기 후반경에는 서양화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넓게 유포되어 있었지 않았나 본다. 중국으로부터 국내에 잠입해 들어온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한 각종 전도서와 교리서 가운데 들어 있는 삽도들이 서양화의 지식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직·간접의 서양화에 대한 지식의 파급이 급기야 화단에도 영향을 미쳐 전통적인 그림에 서양화의 화법인 투시도법, 명암법 등이 적용되는 이른바 태서법의 출현을 가져 오게 되었다. 泰西法이란 서양의 화법이란 뜻으로 동양 전래의 皴法을 무시하고 서양의 투시도법과 명암법을 구사하는 것을 말한다. 뜻을 존중하는 寫意의 화법 대신 현실에 입각한 사실적인 회화수법이 구체적으로 원용되었음을 말한다. 姜世晃·李喜英·洪世燮·姜熙彦 등의 일부 작품은 전통적인 화법에선 엿볼 수 없는 암석의 괴량감을 명암으로 묘출한다든지, 물살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든지, 하늘 부분을 청색으로 구현하여 대상을 구체적인 현실로 반영하는 것 등이다.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에로 가치의 전환이 뚜렷하게 걷잡힌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서울에 외교공관이 세워지면서 서양인들의 내한도 활발해졌다. 이들 가운데 외교, 선교활동 외에 미술관계의 인사들도 몇몇 포함되고 있다. 1899년 궁정의 초청으로 온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와 1900에 초빙되어 온 프랑스 세브르 출신의 도예가 레미옹(Rémion)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보스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의 황실에도 초빙되어 황제를 비롯한 주요관료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당대 대표적인 초상화가였다. 보스는 단기간 서울에 머물면서 고종황제 어진을 비롯 여러 고관대작들의 주문 초상화에 응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내에는 그 유품이 전해지지 않으나 그가 귀국할 때 가져 갔던 3점의 작품-고종황제 어진, 민상호초상, 경복궁 전경-이 그 유족들에 의해 유존되고 있다.

 레미옹은 경인선 철도부설을 위한 기술자로 초빙되어 왔다는 기록도 있고 공예학교 창설을 위해 초청되어 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실현되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이들은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한국에 건너온 최초의 서양인 화가들로서 그들이 그리는 그림을 주변의 한국인들이 목격했을 것이다. 이는 연행사들이 중국 북경에서 서양식의 작품을 대한 것보다는 비록 간접적이긴하나 훨씬 가깝게 서양화를 체험할 수 있었던 기회라고 볼 수 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인 화가들의 내방도 서양화의 유입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1902년 일본인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가 남산에 개인화실을 열었다는 사실과, 당시 조선에 체류했던 일본인 화가들의 동호회가 구성되었다는 점은 적지 않은 일본인 화가들의 이 땅에의 진출을 말해주는 것이다. 1906년 고지마 겐자부로(兒島元三郞)가 관립 한성사범학교 교사로, 1909년엔 히요시 마모루(日吉守)가 경성중학 미술교사로 부임되어 오는 등 점차 일본인 미술교사의 진출이 현저해지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술수업을 통해 서양식 회화수법을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국인으로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 이는 高羲東이었다. 1909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므로서 한국인에 의한 서양화 수학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고희동까지의 전단계로 18·19세기에 걸친 연행사들에 의한 서양화의 접견이 한국인들에 의한 최초의 서양화 체험이라고 한다면, 대한제국 출범 이후 서양화가들의 내한이 주변의 한국인들이 서양화를 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간접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간접적인 체험에 비해 고희동은 직접적 체험이라는 점에서 이 땅의 서양화 효시를 1909년으로 잡아볼 수 있다.

 1910년대는 서화미술회를 비롯한 미술교육기관이 창설됨으로써 지금까지 도제교육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최초의 아카데미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이어서 1918년에 서화협회가 결성됨으로써 최초의 근대적 성격의 화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화미술회는 3년 과정에 畵科와 書科를 두었으며 여러 선생을 두고 강의가 이루어진 미술학교 체제를 갖추었다. 교수진은 安中植·趙錫晉·丁大有·姜璡熙·金應元·姜弼周·李道榮 등이었으며, 여기서 배출된 신진으로는 吳一英·李用雨·金殷鎬·朴勝武·李象範·盧壽鉉·崔禹錫 등이다. 이들은 조선조 이후 근대기의 대표적인 화가들로서 1920년대 이후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통화단을 이끌어 왔다.

 書畵協會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 후진의 교육, 공중의 고취아상을 증진한다는 목적으로 창설된 최초의 미술가 단체이다. 이 협회의 주요 사업으로는 휘호회, 전람회, 의촉제작, 도서인행, 강습소 운영 등으로 나타나는데 단순한 권익옹호의 미술가 집단이기보다는 전시·교육·출판 등을 아우르는 전문가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창작의 진작과 아울러 미술의 대중보급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회원 작품의 전시는 일반에 공개하는 행사로 예술향수가 보편화를 이룩했음을 시사한다. 미술교육은 과거의 제도가 없어진 시점에서 후진양성의 절실성을 감안한 것이다. 서화협회보의 발간은 오늘날의 미술잡지 형태를 취하고 있어 최초의 미술잡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두 차례의 발행으로 그치고 말았으나 미술의 대중보급에 잡지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었다.

 서화협회는 안중식을 회장, 고희동을 총무로 해서 1918년에 출범했으나 바로 다음 해인 1919년 3·1운동으로 인해 전시는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21년에야 1회전을 갖게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단체에 의한 근대적 성격의 미술전이었다.

<吳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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