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2. 근대 예술의 발전
  • 4) 무용
  • (1) 무도의 등장

(1) 무도의 등장

 우리 나라에서 춤이 본격적인 예술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와서라 할 수 있다. 한국무용사에 있어서 근대춤의 기점은 1894년 갑오개혁에서부터 1950년대를 전후한 시기를 말하며 20세기 초는 개화기로서 사회 전부문에서 서구문화의 입김을 경험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한국은 갑오개혁과 더불어 사회개혁이 한창인 시기였고 이러한 시대적인 특성은 한국 근대춤을 태동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교육적 개화인 신교육운동이다. 한국이 다른 열강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시급하였고, 신학문의 수용은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근대사회로의 발전과정에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여성의식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동학이 내세운 여성존중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제창되면서 소위 ‘신여성’이라 하는 신교육을 받은 지식여성계층이 일정하게 형성되었고, 그들의 사회적 진출이 본격화되면서부터 여성사회는 커다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예술계에서는 신문화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문학에서는 신소설·신체시 등 신문학운동이, 미술에서는 서양화가 뿌리를 내리는가 하면, 음악에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양악이 도입되었고, 연극에서는 서구적인 양식의 연극인 신파극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춤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905년 한국춤과 서양춤을 총칭하는 ‘舞蹈’라는 용어의 등장과 함께 극장이라는 공연장소의 발생은 무용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당시 무도란 신문화의 하나로 러시아·구미·일본 등의 새로운 춤을 의미하여 발레뿐만 아니라 러시아民樂舞(Hopark Dance)를 비롯한, 순수예술에 속하지 않는 서양 사교춤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무도의 효시는 1905년(광무 9) 청국공관에서 개최된 舞蹈會의 ‘蹈舞’라는 이름의 사교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1920년에서 1925년 사이에 러시아 海蔘威(시베리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을 지칭)에서 박시몬(Simon 朴)·玄哲·金東煥 등에 의해 사교무도와 러시아 민락무 등이 소개되면서 결정적인 무도시대를 맞게 되었다. 당시 민중들은 이들의 춤을 해외동포 학생들의 춤이라기보다는 민족의식과 문화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동조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기생’, ‘쟁이’들의 여흥물로만 여겼던 춤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사실상 ‘무용’이라는 말은 1914년 일본사람이 만든 것으로서 무용은 뚜렷한 개념이 없이 무도의 별칭으로 쓰여져 왔다.493)송수남,≪한국무용사≫(금광, 1988), 134쪽.

 그러나 무도의 붐은 얼마 못가서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여 그 결과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예술적 의미를 갖춘 춤이 소개된 것은 1926년부터라 할 수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