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5권 신문화 운동Ⅰ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2. 근대 예술의 발전
  • 4) 무용
  • (2) 권번춤의 무대화와 가무극의 번성

(2) 권번춤의 무대화와 가무극의 번성

 서구식 개념의 극장의 등장은 우리의 공연문화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1902년 우리 나라 최초의 국립극장격인 協律社가 세워짐으로써 기생, 무동에 의해 각종 춤이 처음으로 무대화되기 시작했으며494)이두현,≪한국연극사≫(보성문화사, 1973), 138∼141쪽. 우리 나라 춤의 근대화가 극장무대화라면 기생은 춤을 최초로 무대화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생이란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영조 때로서 나라의 관청에 매어 있는 기생은 官妓로, 지방출신의 관기들은 鄕妓로, 서울의 관기들은 京妓로 일컬어졌다. 나라의 큰 잔치가 있을 때는 향기들이 서울에 동원되었는데 개화기 이후 이러한 전통은 기생조합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기생조합의 효시는 1911년 하규일에 의해 설립된 茶洞組合이다.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이던 하규일은 향기출신들을 모아 다동에서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이 다동조합에 이어서 생겨난 조합이 廣橋조합으로 이는 경기들의 결성체이다. 이들 조합에 소속된 기생들은 명창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에 하류출신의 기생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날로 심해지면서 기생조합은 일본식 敎坊의 이름인 券番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에 다동조합은 조선권번으로, 광교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명칭을 달리하였다. 당시 권번에서의 교육은 일정한 수업비를 받고 악기·노래·춤·한문·서예·도화·일어 등의 교양과목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교육과정은 각 분야의 명인이나 명창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에 민속무와 민속악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495)송방송,≪한국음악통사≫(일조각, 1988), 561∼562쪽..

 개화기의 특기할 만한 현상 중 하나는 궁중춤과 민속춤이 한무대에 어우러짐으로써 정악과 속악의 경계선이 붕괴되었다는 것과 무대예술이 서서히 서양영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4년 동안 존속하였던 협률사의 주요 레퍼토리는 창과 춤, 그리고 잡기였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舞鼓·僧舞·劍舞·佳人剪牧丹·船遊樂·項莊舞·抛毬樂·鶴舞·북춤·獅子舞·평양날탕패·창부땅재주·幻燈 등이었다. 이상의 레퍼토리를 분류해보면 단연 가무는 주가 되었고 거기에 날탕패 같은 것이 섞여 있었으며 영화의 영향을 받은 환등이 추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협률사뿐 아니라 사설극장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 사설극장인 광무대의 1900년대 레퍼토리를 보면 官技男舞·가인전목단·검무·승무·한량무·梨花舞·愼眞舞·失射舞·무고·地球舞·항장무·舞童 등이었고 새롭게 電氣光舞라는 이색적인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496)유민영,<新文化수용과 公演>(≪세계로 향한 우리춤 뿌리찾기≫2, 춤의 해 학술분과편찬, 1992), 120쪽..

 영화는 대중오락으로서뿐 아니라 서구문화를 직접 받아들이는 기폭제로 작용하였으며 이런 영화가 처음 활동사진으로 등장했을 때는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오십전 혹은 삼사십전으로 세 시간 동안 어여쁜 여배우의 교태와 소름끼치는 자극과 노래와 음악과 춤을 싫도록 맛보고 게다가 서양원판예술을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으니까 예서 바랄 것이 없다”라는 잡지≪朝光≫(1937년 12월호)의 기사는 당시 영화에 대한 세인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짐작케 한다. 전기광무라는 이색적인 레퍼토리의 등장은 영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된 것이며 이는 춤을 영사기에 찍어 환등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중적 감수성을 자극시켰다. 서양영화의 유행은 또한 음악과 춤을 연극무대로 끌어들임으로써 창·무·극이 통합되는 탈장르적 양상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초창기 신무용가 趙澤元이 土月의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춤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土月會는 전통음악과 전통춤의 조우를 시도한 것이며 이런 가무극은 당시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 노래와 춤에 능한 배우들을 스타로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춤은 연예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나의 독립된 춤으로서가 아닌 歌舞樂의 종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개화기에 설립된 협률사는 고종의 등극 40주년에 참석하게 될 외국의 귀빈들을 대접하기 위해 설립된 서양식 극장이다. 여기서는 1904년부터 창우, 기생들의 가무백희가 자주 공연되었고 1907년 협률사 자리에 우리 나라 최초의 서구식 극장인 圓覺社가 들어서면서 한국의 전통춤은 서구식 무대에 진출하여 관중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왕가 전용공연으로 이루어지던 관기들의 宮中呈才舞나 지방에서 명맥을 이어 오던 민속춤, 교방춤 또는 산대도감, 탈춤, 줄타기, 땅재주 등 흥미 본위의 구경거리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민중의 환호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 때 역시 춤은 단독공연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명창대회격인 판소리연주회에 곁들여진 것이었지만 궁중무용이 서구식 무대에서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당시 획기적인 일이었다. 여기서는 주로 궁중무용이 공연되었는데, 한일합방 이후 官妓制度의 폐지로 掌樂院에 있던 관기들이 지방의 기생조합으로 결집되면서 궁중무를 간략히 변화시킨 춤을 추는가 하면 일반 기생에 의한 민속무가 행해지기도 했다. 당시 상연된 춤으로는 옛 관기들의 것으로 牙拍舞, 선유락, 가인전목단, 항장무, 春鶯囀, 검무 등이 있었고 일반 기녀들의 민속무로는 승무, 농악무, 입춤, 살풀이 등이 행해졌다.497)조원경,≪무용예술≫(해문사, 1967), 120∼121쪽.

 이와 같이 기녀들의 무대활동은 꾸준히 진행되었고 1911년경부터는 신파 극단과 더불어 가설극장에서 승무, 검무 등이 공연되는가 하면 1915년경에는 각 권번이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면서 우리의 전통춤을 보수적인 형태와 진보적인 형태로 나누어 계승, 발달시키기도 하였다.498)≪每日申報≫, 1915년 4월 27일,<共進會舞를 豫觀함>.

 신문화운동의 전개와 더불어 탄생하기 시작한 근대춤은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다소 후진적이었다. 당시 사회는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봉건적 인습이 잔존해 있었고 신지식인 계층의 전통예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말미암아 춤은 광대 또는 기생들이 하는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기생들의 예능활동을 점점 위축시켜 넓은 극장무대가 아닌 주로 큰 요리점의 작은 무대로 옮겨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에 따라 춤의 종류나 내용도 점차 축소·변형되었다. 춘앵전·검무·四鼓舞·長生寶宴之舞·舞鼓 등으로 한정된 춤의 레퍼토리뿐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길고 지루한 부분의 삭제는 원래의 宮中呈才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기생들에 의해 주도된 춤의 극장무대화는 궁중무용이 지닌 장엄함과 화려함을 다소 변형시키고 향락적인 요소를 가미, 일부 부유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춤으로 변질되어 권번에서 추게 됨으로써 전통춤을 퇴색시킨 부정적인 면도 있으나, 쇠퇴일로에 있던 전통춤의 명맥을 이어 주었다는 면에서 기생들의 역할과 그들의 춤은 무용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무용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의 전통춤이 서구식 극장무대에 진출하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때 춤은 하나의 예술로서라기보다는 기녀들에 의해 상연되는, 외형적인 변화에 그친 서구식 무대의 사용이었다.

<柳美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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