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2)≪한성순보≫의 창간
  • (1) 박문국 설치

(1) 박문국 설치

≪한성순보≫의 발행 준비는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朴泳孝 일행이 1883년 1월 6일에 귀국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박영효는 그 전해에 일본에 갔는데 귀국하면서 신문을 발간할 준비를 해 가지고 왔다. 일본의 근대사상가이자 교육자요 언론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추천으로 그가 설립 운영하는 慶應義塾 출신이면서≪時事新報≫의 기자였던 우시바(牛場卓造)를 비롯하여 타카하시(高橋正信), 이노우에(井上角五郞)와 경웅의숙에 유학중이던 兪吉濬을 데리고 왔던 것이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돌아온 지 한달 만인 1883년 2월 6일 한성판윤에 임명되어, 같은 달 28일에는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오늘의 서울시)에서 신문을 발간하라는 하교를 받았다.004)≪承政院日記≫, 고종 20년 1월 21일. 이리하여 박영효는 유길준에게 그 실무작업을 맡겼다. 유길준은 2월 27일 통리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어 박영효가 일본에서 데리고 온 기자 3명과 함께 신문 발간을 준비하게 되었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尹致昊·柳定秀와 함께 유학생으로 남아 경응의숙에서 1년 반 이상 공부했던 경력이 있었으므로 경응출신 일본기자들과 함께 신문을 발간하는 일을 하기에 적절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유길준은 한성부에서의 신문 발간에 필요한 기구와 그 인원 등을 규정한<한성부 신문국 장정>을 비롯해서 신문 창간사와 신문에 대한 해설문까지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005)<漢城府新聞局章程>과 신문 창간사, 그리고 신문에 대한 해설문을 누가 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한 견해는 이 글들을 牛場卓造나 高橋正信 두 사람 중 하나가 쓴 것으로 보았다(崔埈,≪韓國新聞史論攷≫, 일조각, 1976, 17∼18쪽의 註 2와 3 참조).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新聞局章程은 유길준이 혼자서 작성한 것이라고 간단히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창간사와 신문 해설문은 유길준이 쓴 것으로 단정하고, 그렇다면 章程도 그가 작성했을 것으로 보았다(李光麟,≪韓國開化史硏究≫, 63∼64쪽).

그러나 박영효는 한성부에서 신문을 창간하기 전인 4월 10일 불과 2개월의 단명으로 한성판윤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신문 발간의 실무를 맡았던 유길준도 신병을 이유로 4월 16일 통리아문의 주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박영효-유길준이 사임하여 신문 준비작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으므로 박영효를 따라 왔던 우시바와 타카하시 두 사람은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고006)牛場卓造가 東京에 도착한 날은 5월 20일이었다 하니 유길준 사임 직후 牛場는 일본으로 떠났을 것이다(李光麟, 위의 책, 100쪽). 세 사람 가운데 제일 나이가 젊은 이노우에 한 사람만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신문 발간을 계획하고 고종의 허락을 받아 이를 추진하던 박영효와 유길준을 비롯한 실무진이 사임한 후 신문 발간의 업무는 한성부에서 통리아문으로 이관되었다. 통리아문은 조선정부 최초의 근대식 외무기관이었다. 정부는 수신사 일행이 돌아온 직후인 1월 12일 統理機務衙門의 명칭을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하고 이튿날인 1월 13일에는 통리아문의 한 기구로 同文學을 설립하였다.007)≪承政院日記≫, 고종 19년 12월 4일·5일. 한편 同文學의 설립일에 대해서 金允植의≪陰晴史≫에는 임오년 11월 21일(양력 1882년 12월 30일)에 설립된 것으로 쓰여 있다.

동문학은 중국의 同文館과 같은 기능을 가진 기구로, 외국어교육이 주요 목적이었지만 2월에 통리아문의 장정이 제정될 때에 동문학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아울러 新聞報館을 개설한다는 조문이 들어 있었으므로008)全海宗,≪韓國近世外交關係文獻備要≫(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1966), 15∼16쪽. 이 기관에서 신문 발간을 맡게 된 것이다.

8월 17일에는 동문학의 부속기구로 박문국을 새로 설치하였다.009)≪承政院日記≫, 고종 20년 7월 15일.
≪日省錄≫, 계미 7월 15일.
≪草記≫, 계미 7월 15일.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사는 통리아문의 동문학 부속기관인 박문국인데, 苧洞에서 정식으로 개설된 것이다. 이제 신문 발간의 준비가 통리아문의 부속기관인 박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박문국이 설치되고 金寅植이 주사로 임명된 후, 9월 7일에는 張博·吳容黙·金基駿을 박문국 근무의 司事로 임명하여 실무진을 갖추었다. 이어서 9월 20일부터는 신문 창간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문 발간의 준비는 박문국이 설립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9월 11일(음력 8월 11일)자≪統署日記≫에 김인식이 신문 抄役하느라고 통리아문에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벌써 외국의 신문을 가져다가 순보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공식적인 업무는 9월 20일(음력 8월 20일)부터였다.010)창간호에 실린<本局公告>란을 보면 저동에서 업무를 개시한 것은 9월 20일(음력 8월 20일)부터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끝에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마침내≪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순보는 일본에서 들여온 인쇄기계와 활자로 인쇄하여 A4판 비슷한 판형 24쪽의 책자형으로 제작되었는데 사용문자는 순 한문이었다. 한문만으로 신문을 발간한 것은 오늘의 관점에서는 불합리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신문을 사서 읽을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와 사회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였으므로 한문으로 신문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한글로 제작한 신문이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한성주보≫의 발간 때에 한글을 사용해 보았으나 한문 전용 신문으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 이를 실증하고 있다. 이 때에는 독자가 주로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으며 1894년의 갑오경장 이전까지는 공용문자도 한자였던 것이다.

순보와 주보는 판형이 오늘의 전화번호부 크기였고, 책자형으로 묶어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잡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외형만을 보고 잡지라 할 수는 없고 당시의 인쇄기술과 용지 사정 때문에 책자형으로 만들었을 뿐이고, 발간의 취지나 내용으로 볼 때 틀림없는 신문이라 해야 마땅하다. 중국과 일본에서 발행되던 초창기 신문들도 대개 책자 형태였으나 모두 신문으로 친다. 순보가 발간되던 저동의 박문국은 명동 천주교성당 건너편 중앙극장 근처였다.011)≪京城府史≫(1934), 525쪽에는 박문국의 위치를 黃金町(현 苧洞) 2丁目 168번지 京城憲兵隊 관사 자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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