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2)≪한성순보≫의 창간
  • (2) 신문 발간의 목적

(2) 신문 발간의 목적

신문의 등장은 조선사회의 개화에 큰 자극제가 되었고 관리와 지식인들의 시야를 세계무대로 넓혀 주었다. 신문 발간의 목적을 당시에 발행된 순보와 주보의 기사 가운데서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의 聞見을 넓힌다. 순보는 창간사에 해당하는<순보서>에서 국민들이 내외의 정세를 알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에는 산천이 막혔고 문물과 제도가 서로 달라서 다른 나라 사이에 교류가 없었으나, 이제는 교류가 빈번하여 세계 각국이 이웃 나라와 다름이 없게 되었으므로 정부에서도 박문국을 설치하고 “외국의 신문(外報)을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기사(內事)까지 기재하여 나라 안에 알리는 동시에 열국에까지 반포하여 (국민의) 문견을 넓히려” 한 것이라고 창간 의도를 밝히고 있다. 주보에서도 ‘신문은 국민의 이목’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떻게 하면 6주의 넓은 곳을 또는 만국의 대중을 한눈과 귀로 모두 듣고 살필 수 있겠는가.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6주와 전신을 통하고 만국과 문호를 개방하여 널리 묻고 자료를 수집하여 날로 이목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오직 신보뿐이다(≪漢城周報≫24호, 1886년 8월 16일<新報論>).012)이하 번역문은≪漢城旬報 漢城周報 飜譯版≫(寬勳클럽信永硏究基金, 1983)에서 인용하였다.

둘째, 국민을 敎化한다. 주보의 창간호부터 실린<本局 公告>를 보면 “본보는 바로 私記이니 공평한 의논과 훌륭한 지식으로 세상을 깨우치고 백성을 교화하려” 한다고 천명하였다. 창간사에서도 신문 발간의 목적이 백성의 교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주보는 또한 “신문은 새로운 것을 들음으로써 날로 혁신시켜 주는 것이다”라는 서양말을 인용하여013)≪漢城周報≫30호, 1886년 9월 27일<論新聞紙之益>. 개화파들이 생각하던 신문의 기능을 설명해 주고 있다.

셋째, 부국강병. 신문은 나라가 외국으로부터 모욕당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막을 수 있도록 한다. “나를 아는 것이 적을 아는 것이다”라 한 옛 사람의 말대로 신문은 안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모욕을 막고 전쟁을 없앨 수 있다.014)≪漢城周報≫1호, 1886년 1월 25일<周報序>. 그 동안 폐쇄된 쇄국정책으로 세계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에 어두워 발전된 서양문물에 뒤떨어져 있음을 반성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주보에 실린<신보론>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아, 신보 개설의 이익됨이 어찌 문견을 넓히는 데만 국한되겠는가. 저 구주 각국들은 땅이 그다지 넓지도 못하며 백성이 그다지 많지 않은 데도 부강을 독점하여 6주를 위압하는 것은 역시 신보를 통해 백성을 깨우쳐 날마다 발전하여 만국의 좋은 것을 듣고 보게 하여 총명을 집중시켜 새로운 것을 도모하게 한 때문이다. 우리 나라도 저들과 같이 신보를 간행하여 백성들의 이목을 깨우쳐 주면 백성이 날로 富해질 것이며, 국가도 날로 강해져서 장차 천하를 호령하는 수레를 타고 저 서인들의 앞에 달릴 수 있게 될 것이다(≪漢城周報≫24호, 1886년 8월 16일<新報論>).

넷째, 下意를 상달한다. 신문은 국민들의 고통을 찾아내어 막힌 것을 제거하고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모든 방법을 다 게재하여 정치가 上理에 도달하게 하는데 있다. 비록 서양의 제도를 본받아 신문을 발간하지만 신문이 가진 기능은 옛날 우리의 정치제도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문국을 창설하여 신문을 발간하는 것은 옛날 임금이 箴諫을 訓誦하던 법을 도습하여 취한 것으로써, 다만 서양의 體例를 모방하였을 뿐이다. 下情을 상달시켜 임군과 백성(君民)이 일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 신문 발간의 취지이다.015)≪漢城周報≫30호, 1886년 9월 27일<論新聞紙之益>.

다섯째, 商利에도 도움을 준다. 신문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며 광고매체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 농상공을 비롯하여 기타 모든 영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사업을 광고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局員에게 자문하면 상세히 기재하여 신문을 구독하는 내외의 선비와 상인들에게 알리겠다고 주보의<본국 공고>는 밝히고 있다. 돈을 내고 신문에 광고를 하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사업을 알리려는 사람은 신문을 활용하라는 의미였다. 실제로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광고는 1886년 2월 22일에 발행된 주보 제4호부터 실리기 시작하였다. 독일 무역상 世昌洋行(Edward Meyer & Co.)의 광고를 게재하였고, 제22호에서는 일인의 염색약과 洋木, 각색 양단 등의 광고도 실었다. 아직 다양한 광고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독일과 일본회사의 광고와 同壽館이라는 약국광고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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