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3)≪한성주보≫의 발간
  • (1) 순보와 주보의 차이

(1) 순보와 주보의 차이

순보는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창간된 지 1년 남짓 만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순보가 발간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정변의 와중에 박문국을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순보의 마지막 호는 1884년 10월 9일자로 발행된 제36호이다. 36호 이후 갑신정변이 일어난 12월까지 열흘마다 계속 발행되었다면 다섯 호가 더 나왔을 것이고 그러면 제41호가 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신문은 36호가 마지막이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인가.

여기서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36호를 발행한 후에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발행이 중단되어 있던 상태에서 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에 36호 이후에는 발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이고, 다른 하나는 12월 4일까지 계속 발행은 되었지만 마지막 5호는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해 내려온 것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경우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갑신정변 이후에는 박문국이 파괴되었으므로 신문 발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6개월 뒤인 1885년 5월경부터는 박문국을 중건하고 신문을 발간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복간 준비를 신속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신문의 복간을 바랐던 당시의 여론 때문이었다.

창간호에 실린<주보서>에는 순보가 발간되기 전에는 불편함을 모르고 지냈으나 간행되던 순보가 중단되니 겨우 틔였던 이목이 다시 어두워지는 것 같다고 하며 모든 사람들이 간행을 바랐다. 왕이 박문국을 다시 설치할지 여부에 대한 가부를 의논하도록 한 결과 모두들 다시 설립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파괴된 신문사의 시설을 복구하고 일본에서 인쇄기계를 다시 도입하여 1886년 1월 25일에≪한성주보≫제1호가 나오게 되었다. ‘순보’에서 ‘주보’로 제호가 바뀌었고 제1호부터 새로 창간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은 순보와 주보는 하나의 신문이었다. 단지 발행이 중단된 순보를 복간한 것일 뿐이지만 발행의 간격이 10일(순간)에서 7일(주간)로 달라졌으므로 제호가 주보로 바뀐 것이다.

이와 같이 순보와 주보는 하나의 신문이지만, 주보는 순보에 비해 몇 가지 점에서 더욱 발전된 기능과 체재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주보는 발행의 간격을 1주일에 한 번씩으로 단축하였다. 발행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속보성을 강화하여 뉴스를 더욱 신속히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지금까지 동양의 음력을 기준으로 한 생활단위로 열흘마다 내던 신문을 서양식 생활단위에 따라 1주일에 한 번씩 내게 되었다는 것은 세계화에 접근하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셋째, 한글기사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보의 기사는 세 가지 종류였다. ① 한자 전용, ② 국한문 혼용, ③ 한글 전용의 3형태가 혼재되어 있다. 주보에 국한문 혼용과 한글 전용기사를 실은 것은 신문의 대중화를 지향한 조치였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뜻은 정부기관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한글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문자정책의 혁신을 의미하는 일대 용단이었다.

세 가지 종류의 문자별 기사를 분류해 보면 제1호·제2호에는 국한문 혼용기사가 10건 이상씩이나 있어서 한글 전용기사와 합하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기사의 게재 비율의 확고한 기준은 없었다. 한글을 사용하는 ②와 ③의 기사는 호가 거듭될수록 점차 줄어들어서 1년쯤 후에는≪한성순보≫와 마찬가지로 한문만 사용하는 신문이 되고 말았다. 주보의 한글 사용 의지는 아직은 시대상황보다 한 걸음 빨랐고, 한글의 대중화는 시기상조였던 셈이다.

넷째, 발행횟수의 증가와 체재의 변화 등을 위해서는 박문국의 신문 제작진이 상당히 늘어났다. 순보와 주보는 정부기관에서 발행되었으므로 이 신문을 만들던 사람들의 신분은 정부의 관리였다. 비록 관리들이었다 하더라도 이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기자들이었다. 기자가 늘었다는 것은 언론 발전의 저변이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주보에는 논설격인<사의>란이 신설되어 의견기사를 싣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주보가 순보에 비해 신문의 논평 및 의견제시 기능을 강화한 것으로 근대 신문에 한 걸음 다가선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주보는 이와 같이 순보에 비해 발전된 형태였지만 편집체재는 순보와 비슷하였다.<국내기사>에 이어<私報>·<外報>·<私議>·<集錄>의 순으로 기사를 게재하였다.<외보>는 외국소식으로, 순보의<근사>와 같고<사의>는 논설에 해당하며,<집록>은 논문 또는 피처(feature)기사라 할 수 있다. 기사의 전체 건수를 비교해 보면<외보>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국내기사>보다 외국소식에 더 비중을 두었음은 순보와 마찬가지이다.

주보는 의견기사를 신설하는 동시에 외국관계 기사인<각국근사>의 비중은 줄이고 국내기사를 늘렸다. 순보와 주보의 기사를 비교해 보면 아래<표 1>과 같다.

순보
36호
국내관보 국내사보 각국근사 논 설 집 록 시치탐보 사 고
342
(21.3)
72
(4.49)
1,021
(63.7)
11
(0.69)
117
(7.3)
35
(2.2)
35
(2.2)
1.602
(100)
주보
39호
국내기사 사 보 외 보 사 의 집 록 시치탐보 사고광고
540
(41.57)
6
(0.46)
581
(44.73)
22
(1.69)
62
(4.77)
39
(3)
49
(3.77)
1,299
(100)

<표 1>순보와 주보의 기사 건수 비교(괄호 안은 백분율)

전거:정진석,≪한국언론사≫(나남, 1990), 65∼85쪽.

위의<표 1>에서 나타나듯이 순보에는<국내관보>가 21.3%에 지나지 않았으나 주보에서는 41.57%로 배가 늘어났다. 반면에<각국근사>(외보)는 63.7%에서 44.73%로 떨어졌다.<논설>과<집록>도 외국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러므로 순보의<각국근사>와<논설>·<집록>을 합친 외국기사는 70%가 넘고 주보도<외보>와<집록>을 합치면 외국기사는 50%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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