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3)≪한성주보≫의 발간
  • (3) 기사의 출처

(3) 기사의 출처

① 국내기사:순보의<국내관보>와<국내사보>그리고 주보의<국내기사>는 주로 국왕의 諭旨, 의정부에서 왕에게 올리는 啓, 각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 등의 관청기사이다. 지방이나 유생들이 올리는 상소문을 모두 신문에 실을 수는 없었으므로 순보 제33호(1884년 9월 10일)에는 으레 올리는 상소문은 싣지 말라는 왕의 유지가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주보의 국내기사는≪朝報≫를 인용한 경우도 더러 있었고, 매호에 실리는<時直探報>는 그 때의 물가시세를 취재한 것이다.

② 외국서적:순보와 주보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각국근사>와<집록>등 외국관계 기사는 외국의 신문, 잡지 및 단행본에 실린 것을 옮겨 실었다.

③ 외국신문:순보와 주보는 중국과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주요 뉴스 원으로 이용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신문 외에는 영국에서 발간된 신문을 많이 인용하였다. 영국의≪The Times(泰晤士日報)≫와≪Reuter(路透)≫도 있었고, 미국·프랑스·러시아·독일 등의 구미열강 선진국 신문들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나라의 여러 신문들 가운데 중국과 일본에서 발간된 것들은 번역이 가능했겠지만, 서양의 신문은 직접 번역이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서양어를 능통하게 번역 또는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1883년에 보빙사가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는 없었으며,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을 세운 것은 순보가 창간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보와 주보는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보고 외국기사를 만들었다. 서구어 신문을 인용한 기사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간된 신문기사를 간접 인용하면서 직접 인용한 것처럼 썼을 것이다. 다만 기사에 따라서는 간접 인용임을 밝힌 경우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 중국과 일본의 신문에서 重譯의 절차에 따라 서양의 소식과 문물제도 등을 소개했지만, 개화의 모델로 삼고자 했던 서양 각 나라의 신문과 서적들에 실린 내용을 폭넓게 수용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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