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1) 민간지 등장의 시대적 배경

1) 민간지 등장의 시대적 배경

민간신문의 시대는 1896년(건양 1) 4월 7일 서재필이≪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3년부터 박문국에서 발간한≪한성순보≫였지만 민간인이 신문을 창간하여 구독료와 광고료의 수입으로 독자적으로 운영한 것은≪독립신문≫이 처음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러 종류의 민간지들이 나오게 되었다.

비슷한 때에 일인들도 우리 나라에서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계통에서도 인쇄시설을 갖추어 주로 종교관계 출판사업을 시작하면서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신문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 무렵에 잡지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발행한 영문잡지≪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1892년 1월)를 비롯하여, 일본유학생들이 동경에서 발간한 한국어 잡지≪친목회회보≫(1896년 2월)와 독립협회의 기관지≪대죠션독립협회회보≫(1896년 11월)도 나왔다. 이와 같이 서재필의≪독립신문≫이 창간된 1896년을 기점으로 민간신문이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독립신문≫의 창간은 정치적인 변혁과 사회운동사의 관점에서도 혁신적인 의의를 부여할 수 있지만, 국어운동사에도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하였다.≪독립신문≫이 한글 전용의 띄어쓰기로 신문을 제작하여 그 이후에 나타난 한말의 여러 민간신문들이 이를 뒤따르게 되었고, 한글이 공용문자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개화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880년대부터였는데 초기 개화운동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한성순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운동은 소수의 선각자들이 국민들에게 개화사상을 불어넣어 주려 했던 이른바 위로부터의 운동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0년대는 다수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사회적으로 튼튼한 기반을 다지게 됨으로써 횡적으로 확산되는 대중화운동으로 발전되어 나아갔다.

이처럼 1890년대의 개화운동을 1880년대와 다른 차원으로 발전케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독립신문≫이었다. 국민들은 이 신문에 실린 논설과 기사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되었으며, 또 독립정신과 비판정신을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이 창간된 시기에 일본은 침략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한반도 진출의 야욕을 지닌 러시아와도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일본은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중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으나 조선정부가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데 대한 불만으로 이듬해 10월에는 궁중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俄館播遷)하여 러시아의 영향이 증대되고 있었으며, 서구열강 여러 나라들은 각종 이권을 탈취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무력침략과 병행하여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면서 경제침략과 언론침략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일본은 1895년 2월 15일(2월 17일이라는 설도 있다)부터 서울에서≪漢城新報≫를 발행하여 언론침략을 위한 전위기구로 삼고 있었다.

은둔의 작은 왕국이었던 조선은 열강의 침탈과 밀려 들어오는 서구문물의 도전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세계무대에서 독립된 자주국가의 일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열강의 종속국으로 전락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에 대처할 능력과 경륜이 부족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서재필은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와 신문을 발행하였던 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기에 창간된≪독립신문≫은 국권의 회복과 정치 사회의 개혁을 지향하면서 국민계몽과 민권의 신장을 위한 횃불을 높이 들어 국민의 여론을 환기하고 민중의 힘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협회가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개혁을 추진한 것도≪독립신문≫과 그 이후에 나오기 시작한 신문들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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