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2) 최초의 민간지≪독립신문≫
  • (5) 서재필의 추방

(5) 서재필의 추방

≪독립신문≫이 열강세력과 정부관리들을 비판하자 러시아와 친러 수구파들은 서재필의 추방을 획책하게 되었다. 외부대신 조병직은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한다고 1897년 12월 13일자로 미국공사 알렌에게 통고하였다. 조병직은 이튿날인 12월 14일에는 농상공부에 통보하여 서재필을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하였으므로≪독립신문≫도 폐간시키라고 요청하였다. 서재필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봉쇄하려는 조치였다.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려는 러시아와 한국정부의 음모에 서재필은 강력히 불만을 표시하였다. 그는≪독립신문≫의 논설을 통해서 정부와 러시아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자신은 거의 2년 동안 열과 성을 기울여 나라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정부의 박대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그 동안 나라를 위하여 바른 말한 것이 죄가 된다면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겠으며, 신문도 앞으로 더 이상 발간하지 않겠다는 뜻까지 비추었다.028)≪독립신문≫, 1897년 12월 18일, 논설.

서재필은 정부에서 자신을 중추원 고문으로 위촉한 계약기한이 10년이라는 이유를 들어 앞으로 남은 8년간의 봉급을 지불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미국공사 알렌도 한국정부가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을 해임하는 것은 계약을 위반하는 부당한 조치라고 항의하면서 서재필이 요구하는 대로 계약 만료까지 남은 기간의 봉급 전액을 일시불로 지급해 주어야 하며, 이 금액을 받는다 하더라도 서재필이 한국에서 떠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서재필을 대리한 알렌과 한국정부 사이의 교섭은 5개월이 지난 1898년 4월 26일에야 타결되었다. 정부는 서재필이 요구한 미불급료 전액과 그가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서재필과 10년 기한으로 계약한 기간 가운데 남은 7년 10개월 분의 봉급은 28,200원이었고 여기에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더하면 28,800원이 되었다. 정부는 이 가운데≪독립신문≫을 창간할 당시 서재필에게 지급하였던 4,400원(창간 준비금 3,000원, 가옥구입 및 생계비 1,400원)을 공제한 24,400원을 지급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서재필의 도미를 만류하였으나 그는 1898년 5월 14일 용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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