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3) 외국인의 신문 발행과 잡지
  • (1) 일본인 발행의 신문들

(1) 일본인 발행의 신문들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동양 3국은 수세기 전부터 전근대적 서한신문 또는 필사신문으로 불리는 신문 유사물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朝報≫, 일본의≪요미우리(讀賣)≫또는≪카와라반(瓦板)≫, 그리고 중국의≪朝報≫·≪京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 유사물이 근대적인 형태의 신문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 근대적인 신문이 생성 발달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은 널리 인식되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언론사는 대체로 이러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 신문의 초기 단계인 한성순보와 주보의 발간에는 서양보다는 일본과 중국의 신문을 참고로 하였다. 순보 창간에 앞서 일본인들은 부산에서 일본어로 된 신문과 잡지를 먼저 발행하였다. 일본거류민 釜山商法會議所에서 1881년 12월 10일부터 일본어와 한문으로≪朝鮮新報≫라는 순간 신문을 발행하였고, 1892년 9월부터는 부산에서≪鷄林≫이라는 잡지도 발행하였다.

일인들은 그 후 인천에서≪仁川京城隔週商報≫(1890년 1월 28일)를 창간하여 제호를≪朝鮮旬報≫(1891년 9월 1일),≪朝鮮新報≫(1892년 4월 15일)로 바꾸면서 발간을 계속하였고, 서울에서는 1895년 2월 15일부터 한국어와 일어로 된 격일간≪漢城新報≫를 창간하였다.

≪한성신보≫는 우리말로 발행된 신문 가운데는 처음으로 오사카(大版) 스탠더드 사이즈로 인쇄하면서 4호와 2호 활자를 섞어 쓰는 기술을 사용하였다. 이 신문도 당시 다른 인쇄물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4호 활자였지만 강조할 부분에는 2호 활자를 병용하였다. 이러한 제작방법은 아직 우리 나라의 다른 출판물은 채용하지 못했던 기술이었다. 순수한 인쇄기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제작기술은 우리의 신문 인쇄기술 향상에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은 1904년부터 여러 개로 늘었다. 러일 전쟁 이후에 일본은 한국침략의 수단으로 신문을 활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인들이 발간한 신문은 반민족적인 내용이었지만, 인쇄의 발달과 신문 편집기술의 향상을 촉진한 측면이 있었다. 신문의 색도인쇄, 소설연재 등은 일본인 발행 신문이 먼저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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