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3) 외국인의 신문 발행과 잡지
  • (2) 기독교계통의 종교신문

(2) 기독교계통의 종교신문

1990년대로 넘어와서 민간신문이 창간될 무렵에는 기독교에서도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선교의 방편으로 대개 세 가지 사업을 병행하였는데 그것은 교육사업, 의료사업, 그리고 출판사업이었다. 출판사업은 다시 세 부류의 독자를 대상으로 발행하였는데, ①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것, ② 한국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것, 그리고 ③ 선교사를 파견한 나라의 교회를 상대로 하는 3가지 종류였다.

①에 속하는 신문은 감리교의≪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년 2월 2일), 장로교의≪그리스도신문≫(1897년 4월 1일)이다. 천주교의 프랑스신부 드망즈(Florian Demange, 安世華)가 발행하던≪京鄕新聞≫(1906. 10. 19)도 이에 속한다.

②의 부류로는 감리교회의≪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가 있고, ③은 영국 성공회의≪모닝 캄≫(≪The Morning Calm≫)이 있다.≪모닝 캄≫은 우리 나라와 관련되어 외국인이 발행한 최초의 잡지였다. 1890년 7월에 창간되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발행된 것이 아니라 런던에서 인쇄되어 우리 나라와 영국 등지에서 배포하였다. 제작방법은 서울에서 만든 원고를 런던으로 보내면 런던에서 인쇄 발행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발행된 잡지로 볼 수는 없다.

선교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어야 하였으므로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출판사업과 함께 한국어 문법서 또는 사전을 펴내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의 대중를 상대로 하는 선교를 위해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으로 성서를 한글로 출판하였다. 이들 기독교 출판물은 한글보급에 공헌하게 되었다.

감리교와 장로교는 거의 비슷한 때에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출판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감리교는 1897년 2월 2일 한글 전용의 주간신문≪죠션크리스도인회보≫(≪The Christian Advocate≫)를 창간하였다. 발행인은 아펜젤러였다.≪죠션크리스도인회보≫는 1897년 12월 8일부터는≪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개제하였는데, 1900년의 경우 서울에 340부를 비롯하여 전국에 걸쳐 810여 부가 배포되었다.

장로교에서는 1897년 4월 1일부터≪그리스도신문≫(≪The Christian News≫)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발행인은 언더우드(H. G. Underwood)였다.≪대한크리스도인회보≫와≪그리스도신문≫은 이후 8년 동안 발행되다가 1905년에 이르러 두 교파 신문의 통합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여 그 해 6월 24일에 각각 폐간호를 내고 7월 1일부터≪그리스도신문≫이라는 주간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처음으로 감리교와 장로교의 연합신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사장은 캐나다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 게일(J. S. Gale)이었으며 장·감 양 교회에서 운영 및 편집에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1907년 12월 10일부터는≪예수교신보≫(≪The Church Herald≫)로 이름을 바꾸어 격주간으로 나오다가 한일합병이 되던 해인 1910년 2월 21일에 폐간되었다.

이리하여 한동안 초교파적인 신문을 발행하던 양 교파는 다시 두 신문을 따로 발행하게 되었다. 장로교는≪예수교회보≫(≪The Christian News≫, 1910년 2월 24일 창간)를, 감리교는≪그리스도회보≫(≪The Korean Christian Advocate≫, 1911년 1월 31일 창간)를 각각 발행하였다. 양 교파가 또 다시 연합신문을 발행한 것은 1915년의≪긔독신보≫였다. 한편 천주교회에서는 1906년 10월 19일 주간으로≪경향신문≫을 창간하였다. 발행인은 프랑스 신부 安世華(Florian Demange)였다.

한말 외국인들이 발행한 신문·잡지·출판물들의 한국언론 발달에 미친 영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양선교사들과 일인들이 만주·상해·요코하마 등지에서 한글활자를 만들고 서양식 인쇄시설을 들여 왔다. 그러므로 인쇄문화의 발달은 이들 나라와의 관련을 무시할 수 없다. 둘째, 선교사들이 운영했던 삼문출판사와 일인 경영의 신문들은 한국의 신문발달 초기에는 기술전수 또는 기술인력을 공급하였을 것이다. 셋째, 이들 출판사는 한국의 신문·잡지 창간을 자극했고 도움을 주었다.≪독립신문≫과≪대한일신보≫는 한글과 영문 2개 국어로 편집되었는데, 이 두 신문이 다 같이 3개월 정도의 짧은 준비기간 밖에 갖지 못했으면서도 영문판까지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서양인들이 경영하고 있던 출판사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넷째, 특히 서양선교사들의 한글출판물은≪독립신문≫·≪일신문≫·≪뎨국신문≫등 한국 초기 신문의 한글 전용을 자극하고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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