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4) 일간지 ≪일신문≫
  • (1) 배재학당의 ≪협셩회회보≫

(1) 배재학당의 ≪협셩회회보≫

1898년은 언론사에서 그 이전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적인 획을 그은 해였다. 이 해에는 ≪협셩회회보≫-≪일신문≫의 창간에 이어 한말 대표적인 민족지 ≪뎨국신문≫과 ≪皇城新聞≫이 창간되어 ≪독립신문≫·≪한성신보≫ 그리고 종교 계통의 신문을 합쳐서 우리 나라에도 ‘언론계’가 완전히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에는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언론단체인 ‘신문사 친목회’가 결성되어 언론의 자유와 언론의 경영문제 등을 공동으로 논의하면서 언론인의 친목도 도모하게 되었다.

민간신문의 이와 같은 급속한 성장은 크게 두 가지 여건이 작용한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이 민간신문의 발간을 촉진하였다. 개화사상이 확산되었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사회개혁운동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정보의 욕구가 상승되었으며 동시에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신문을 발간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두 번째 여건으로는 사회 지도계층간에 신문도 기업으로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에 힘입어 창간되었으나 구독료와 광고료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였다.≪독립신문≫보다 한 해 먼저 일인들이 발행하기 시작했던 ≪한성신보≫와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가 1897년부터 각각 발행하기 시작한 ≪대한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도 민간신문의 발행을 자극하였다.

≪협셩회회보≫·≪일신문≫은 1년 3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밖에 발간되지 못했으나 초기 한국신문사에 찬연한 빛을 남긴 신문이다.≪협셩회회보≫를 발간한 협성회는 1896년 11월 30일에 결성된 배재학당 학생회였다. 협성회는 서재필의 지도로 결성되어 서양식 회의 운영방식에 따라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는 그 목적을 “충군애국지심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033)≪협성회회보≫1호, 1898년 1월 1일, 론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이 시작된 배재학당에서 서양의 민주적 회의 진행방식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어떤 문제를 놓고 공개토론을 전개한다는 것은 학교내의 행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이었다. 더구나 회원을 학생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찬성원’제를 두어 관리와 시민 등 뜻있는 젊은이에게는 문호를 개방하여 협성회는 하나의 사회단체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협성회의 가장 큰 업적은≪협셩회회보≫의 창간이었다.

≪협셩회회보≫를 발간하기에 앞서서 협성회는 공개토론회를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논의하였다. ‘우리 회즁에셔 일쥬일간 회보를 발간함이 가홈’(제29회 토론), ‘신문국을 각쳐에 배설야 인민의 이목을 열님이 가홈’(제33회 토론)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인 끝에 1898년 1월 1일≪협셩회회보≫를 창간하였다.

이 때까지 민간지로는≪독립신문≫밖에 없었고, 일인들이 발간하고 있던≪한성신보≫(국한문·일문지)와 아펜젤러가 발행하는 주간≪죠션크리스도인회보≫와 언더우드의≪그리스도신문≫이 있었다.≪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서재필은 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엄격히 따지면≪독립신문≫도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협셩회회보≫는 외부의 지원 없이 처음으로 민간인들이 발간하는 신문이었다.≪협셩회회보≫는 협성회의 기관지였으나 편집체재와 내용은 완전히 일반 종합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협셩회회보≫는 발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 번 발간기에 십여원식 밋져가며 이 회보를 발간는 것은 젼국 동포의 이목을 여러 내외국 형편이 엇더케 될 줄을 대강 알게 고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일심합력여 우흐로 님군과 나라를 밧들고 아래로 우리 동포의 집안들을 보호여 가자고 반론여 시작한 것이러니…

≪협셩회회보≫는≪독립신문≫과 똑같은 체재를 답습하였다. 4·6배판 2단제로서 1면에는<론셜>을 싣고, 2면·3면에<내보>와<외보>, 그리고 맨 마지막인 4면 끝에 협성회의 소식인<회즁잡보>을 실었다. 이<회즁잡보>도 당시 협성회의 사회적인 위치로 보아서 일반에게 뉴스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특이한 것으로는 제4호(1월 22일)부터 시작하여 최병헌·신용진(6호)·이익진(7호)·오긍선(11호)·이승만(12호)·홍정원(13호)·김만식(14호) 등의 기명 논설을 게재한 일이다.

≪협셩회회보≫는 치외법권적인 위치에서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외국인들을 비난하고, 내정에 대해서도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을 가하였다. 한 예로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인쳔신보에 말엿시되 양인 차례라 난놈이 요리집에서 슐을 먹다가 우리 나라 사람 수십명이 구경난 것을 총으로 노으매 그즁에 한 사람이 마져 탄알이 뼈를 듥고 배로 드러가 거의 죽게 되엿다 니 그러케 악한 오랑캐놈을 당쟝에 셜분 못 엿스니 듯난 자의게 분한 일이나 쟝 정부에셔 법률대로 죠쳐할 일일너라(≪협셩회회보≫4호, 1898년 1월 22일,<내보>).

인천에서 서양인이 술 마시는 모습을 한국인들이 몰려가 구경하는데 이를 귀찮게 여긴 서양인이 권총을 쏘아 구경꾼의 배를 관통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사실 보도와 함께 기자의 주관이 첨가된 논평기사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와 같이 악한 ‘오랑캐놈’에게 그 자리에서 분풀이하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고 말하면서 정부의 조처를 요구한 것이다.

≪협셩회회보≫는 회원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반을 상대로 판매와 배달도 하여 일반 대중에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다. 이리하여 처음 협성회를 창립할 당시에는 불과 10여 명의 발론으로 시작하였으나,≪협셩회회보≫가 창간될 무렵에는 회원이 2백여 명으로 늘어났고, 신문을 발간한 후에는 일반에도 큰 호응을 받아 오래지 않아 근 3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제5호(1월 30일자)부터는 1898년(광무 2년) 1월 26일에 농상공부의 정식인가를 받았음을 제호 아래에 밝히고 있으며, 이 신문이 학교 내·외의 큰 호응을 받자 협성회는 4월 2일자로 발간한 제14호를 마지막으로 주간 발행을 중단하고, 15호째 발간일자인 4월 9일부터는 우리 나라 첫 일간지인≪일신문≫을 창간하였다.≪협셩회회보≫는 과격한 정부비판의 논조로 말미암아 고종의 內命으로 폐간되었다고도 알려져 왔으나, 이는 강제 폐간이 아니라 일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제호를 바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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