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4) 일간지 ≪일신문≫
  • (4)≪상무총보≫발간

(4)≪상무총보≫발간

≪일신문≫은 1899년 4월 4일에 폐간되었다. 겨우 1년 3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밖에 발행되지 못한 것이다.≪일신문≫은 당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언론 발달에 기폭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1898년 말에 독립협회가 혁파되고 혁신세력이 꺾이면서 이 신문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폐간의 가장 큰 이유는 경영난과 내분 때문이었다. 이에 앞서≪일신문≫의 내분으로 이 신문을 뛰쳐나온 이승만·유영석 등은≪일일신문≫을 발간하다가 8월 10일부터는 李鍾一이 창간한≪뎨국신문≫에 합류하였다. 이 신문은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지로서 혁신세력을 대변하여 언론 발달에 다음과 같이 기여하였다.

첫째 최초의 일간지로서 다른 신문에 자극을 주어 일간신문시대의 문을 열었고, 둘째≪일일신문≫·≪뎨국신문≫·≪상무총보≫(후에≪대한상무신보≫) 등의 창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셋째 민간신문의 외세에 대한 저항적 전통수립에 이바지하였다.≪독립신문≫이 기초를 잡은 한국신문의 특성은≪일신문≫이 발간됨으로써 확고한 전통으로 계승·발전된 것이다. 이 신문은 러시아와 프랑스, 일본 등 당시 한반도에서의 이권침략을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열강세력에 저항하였으나,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이는 이 신문이 미국인의 운영하에 있던 배재학당 학생들이 제작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경영면에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신문 경영에 경험이 없는 젊은 청년들이 외부의 보조 없이 자력으로 시작한 최초의 신문이었으며, 당시 사회적 여건상 일간신문이 경영면에서 자립하기에는 아직 시기가 빨랐고, 신문 발간의 사회적 후원세력이 와해된 정치상황의 변화 등이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정반대 입장에 있었던 보부상 쪽으로 팔려,≪商務總報≫로 개제되었다.

폐간한≪일신문≫의 인쇄시설은 상무회사에서 인수하여≪상무총보≫라는 신문을 창간하였다.≪상무총보≫는 남아 있는 지면이 한 호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 신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상무회사에서는≪일신문≫을 인수하여 사장에 길영수, 총무원을 나유석으로 하여 신문 발간을 준비하였다. 길영수는 바로 황국협회 보부상 패의 선봉장으로 독립협회 탄압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독립신문≫과≪황성신문≫에 실린 1889년 4월 10일자 광고에는≪상무총보≫가 4월 12일에 창간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 창간호는 4월 14일(음력 3월 5일)자로 나왔다. 이 신문 역시≪일신문≫처럼 한글 전용이었으나 제목은 한자를 섞어 썼다. 내용은 ‘상무발달’과 상도확립 등 경제·상업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신문이었다.

≪상무총보≫는 주로 보부상조직을 통하여 보급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예상대로 판매되지 않자≪시사총보≫에 광고까지 하는 등 보급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시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 더구나 겨우 2주일밖에 발행되지 않았던 4월 말에는 급료문제로 사원들이 일제히 퇴사하는 사태까지 생겼다.

이 신문은 처음에는 농상공부의 인가도 없이 발간되었던지 각 지방에 보내는 우편발송에도 문제가 있었고, 5월 하순에는 마침내 휴간에 들어갔다가, 길영수가 7월에 상공국장이 되면서 사옥을 법부 뒤 전 검률청으로 옮겨 속간하려 했으나 제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9월에는 제호를≪대한상무신보≫로 개제하여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9월 6일부터 속간했으나, 어쩐 일인지 상무회사에서도 보급에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신문은 황국협회 계열로 경영이 넘어간 후에는 일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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