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5) 새로운 신문들
  • (1)≪경성신문≫·≪대한황셩신문≫

(1)≪경성신문≫·≪대한황셩신문≫

≪京城新聞≫은 1898년 3월 2일에 창간되어 같은 해 9월 5일에≪황성신문≫이 되는 신문이다.≪경성신문≫의 사장은 윤치호, 사무원은 鄭海源이었다. 이 두 사람의 명의로 농상공부에 제출한 신문발행 청원서에 의하면≪경성신문≫은 매주 수·토요일 2회 발행하며 “각도 각군에 송출하여 各項商民의 이익을 助코저” 한다는 것으로, 상업흥왕에 그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경성신문≫은 상업의 부흥을 위한 신문을 지향했던 것이다. 창간 직후 3월 5일자≪협셩회회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경성신문이 본월 이일에 처음으로 낫 이 신문은 우리 나라 사이 주쟝야 슌국문으로 인 각종물가를 쇼샹히 엿스니 샹무샹에 우 요긴더라(≪협셩회회보≫, 1898년 3월 5일,<보>).

≪경성신문≫은 典洞 윤치호의 집에서 판매하였고035)≪협셩회회보≫, 1898년 3월 5일 이후 26일자까지 4회에 걸친 광고. 편집사무실도 사장 윤치호의 집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신문의 발행허가는 윤치호의 명의로 얻었으나, 실질적인 경영은 그의 4촌 동생 尹致昭가 맡았었다는 데,036)霞 汀,<조선신문발달사>(≪新東亞≫, 1934년 5월호), 54쪽.
車相瓚,<조선신문발달사>(≪朝光≫, 1936년 11월호), 44쪽.
윤치호는 이 해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부터는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 그 일에 전념하였기 때문에≪경성신문≫에는 많이 간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경성신문≫은 4월 6일(제11호)부터 제호를≪대한황셩신문≫으로 바꾸고 柳瑾이 주필을 맡았다. 이 때는≪협셩회회보≫가 주간에서 일간≪일신문≫으로 개제하기 이틀 전이었다. 제호를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개제 첫호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가 농공상부 허가를 엇어 신문샤를 설치하고 일흠을 경성신문이라 하였더니 이제 대한황셩신문이라 다시 곳치기 우리 나라 쥬독립한 후에 셰계 각국에셔 우리 나라 사람도 신문하 줄을 알게 이라

≪대한황성신문≫으로 개제한 것은 자주독립국인 대한에서 신문을 발간하고 있음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호가 명시된≪대한황성신문≫의 제호가≪경성신문≫보다 더 적절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제호만 바뀌었을 뿐 운영자나 편집자는 변화가 없었다.

≪대한황셩신문≫은 장차 일간으로 발행되는≪황성신문≫의 기틀을 잡아 나아갔다. 새로운 모금방식으로 股金制 합자회사로 운영하였는데037)≪일신문≫, 5월 12일<잡보>에 “자본젼은 여러히 회샤를 모하 각기 고분금을 낼터인 목에 십원식이니…” 그리고≪독립신문≫7월 15일자<광고>에서는 “본샤 고본표 가지신이 젼 우슌쳥으로 오시오”라는 표현이 있어≪대한황성신문≫이 股金制를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1898년 7월 16일에 열렸던 사원총회에서 제정한<皇城新聞社規則>제6조에 ‘本社 各 社員에게 出資衿券을 交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주식회사와 같은 형태로서 5월부터 股票 5백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성하였다. 1股의 가격은 10원씩이었다.038)≪일신문≫, 1898년 5월 12일 잡보. 이와 함께 신문사의 규칙을 제정하였고,039)≪독립신문≫, 1898년 7월 15일, 광고에는 “황셩신문샤의 규칙을 의뎡고 림원도 션뎡랴고…”라는 말이 있다. 9월 5일에≪황성신문≫으로 발전한 뒤에는 주주총회인 사원총회에서 사장을 선출하였다. 초대 南宮檍과 제2대 사장 張志淵도 사원총회에서 선출된 사장들이다. 이 신문에는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 각 지역을 망라한 인물들이 참여하였고, 자본금도 특정인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여러 유지들이 공동 출자하여 민족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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