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城新聞≫은 1898년 3월 2일에 창간되어 같은 해 9월 5일에≪황성신문≫이 되는 신문이다.≪경성신문≫의 사장은 윤치호, 사무원은 鄭海源이었다. 이 두 사람의 명의로 농상공부에 제출한 신문발행 청원서에 의하면≪경성신문≫은 매주 수·토요일 2회 발행하며 “각도 각군에 송출하여 各項商民의 이익을 助코저” 한다는 것으로, 상업흥왕에 그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경성신문≫은 상업의 부흥을 위한 신문을 지향했던 것이다. 창간 직후 3월 5일자≪협셩회회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경성신문이 본월 이일에 처음으로 낫 이 신문은 우리 나라 사이 주쟝야 슌국문으로 인 각종물가를 쇼샹히 엿스니 샹무샹에 우 요긴더라(≪협셩회회보≫, 1898년 3월 5일,<보>).
≪경성신문≫은 典洞 윤치호의 집에서 판매하였고035)≪협셩회회보≫, 1898년 3월 5일 이후 26일자까지 4회에 걸친 광고. 편집사무실도 사장 윤치호의 집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신문의 발행허가는 윤치호의 명의로 얻었으나, 실질적인 경영은 그의 4촌 동생 尹致昭가 맡았었다는 데,036)霞 汀,<조선신문발달사>(≪新東亞≫, 1934년 5월호), 54쪽.
車相瓚,<조선신문발달사>(≪朝光≫, 1936년 11월호), 44쪽. 윤치호는 이 해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부터는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 그 일에 전념하였기 때문에≪경성신문≫에는 많이 간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경성신문≫은 4월 6일(제11호)부터 제호를≪대한황셩신문≫으로 바꾸고 柳瑾이 주필을 맡았다. 이 때는≪협셩회회보≫가 주간에서 일간≪일신문≫으로 개제하기 이틀 전이었다. 제호를 바꾼 이유에 대해서는 개제 첫호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가 농공상부 허가를 엇어 신문샤를 설치하고 일흠을 경성신문이라 하였더니 이제 대한황셩신문이라 다시 곳치기 우리 나라 쥬독립한 후에 셰계 각국에셔 우리 나라 사람도 신문하 줄을 알게 이라
≪대한황성신문≫으로 개제한 것은 자주독립국인 대한에서 신문을 발간하고 있음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호가 명시된≪대한황성신문≫의 제호가≪경성신문≫보다 더 적절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제호만 바뀌었을 뿐 운영자나 편집자는 변화가 없었다.
≪대한황셩신문≫은 장차 일간으로 발행되는≪황성신문≫의 기틀을 잡아 나아갔다. 새로운 모금방식으로 股金制 합자회사로 운영하였는데037)≪일신문≫, 5월 12일<잡보>에 “자본젼은 여러히 회샤를 모하 각기 고분금을 낼터인 목에 십원식이니…” 그리고≪독립신문≫7월 15일자<광고>에서는 “본샤 고본표 가지신이 젼 우슌쳥으로 오시오”라는 표현이 있어≪대한황성신문≫이 股金制를 채택했음을 알 수 있다. 1898년 7월 16일에 열렸던 사원총회에서 제정한<皇城新聞社規則>제6조에 ‘本社 各 社員에게 出資衿券을 交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주식회사와 같은 형태로서 5월부터 股票 5백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성하였다. 1股의 가격은 10원씩이었다.038)≪일신문≫, 1898년 5월 12일 잡보. 이와 함께 신문사의 규칙을 제정하였고,039)≪독립신문≫, 1898년 7월 15일, 광고에는 “황셩신문샤의 규칙을 의뎡고 림원도 션뎡랴고…”라는 말이 있다. 9월 5일에≪황성신문≫으로 발전한 뒤에는 주주총회인 사원총회에서 사장을 선출하였다. 초대 南宮檍과 제2대 사장 張志淵도 사원총회에서 선출된 사장들이다. 이 신문에는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 각 지역을 망라한 인물들이 참여하였고, 자본금도 특정인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여러 유지들이 공동 출자하여 민족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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