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2. 근대 언론의 발달
  • 5) 새로운 신문들
  • (2) 필화사건

(2) 필화사건

≪대한황셩신문≫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인해 신문사가 피소당한 최초의 사건을 겪었다. 7월에 경기도 과천군청에 소속된 관리 金聲杓가 군수 吉泳洙의 비위사실을 투서한 내용을 보도했는데, 길영수는 이를 사실무근이라 하여 한성재판소에≪대한황셩신문≫을 고소하고 공판일에는 과천주민 수백 명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재판소 앞에 집합시켜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대한황셩측에서는 주필 유근이 재판정에 출두했는데 원고 길영수의 요구로 유근은 투서한 사람의 이름이 ‘김성표’임을 밝히고 말았다. 그 후 길영수는 투서한 김성표를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번졌으나≪대한황셩신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040)≪檢事局起案≫(서울대 규장각도서) 31호, 광무 2년 8월.
≪皇城新聞≫, 1898. 9. 7, 잡보<人孰無過>.
길영수는 이듬해 4월에는≪일신문≫을 인수하여≪상무총보≫로 개제하고 사장에 취임한 사람이다.

≪대한황셩신문≫은 일본에서 수입한 인쇄기계를 설치하고 사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8월부터 휴간에 들어갔다가 9월 5일부터는≪황성신문≫으로 개제하여 일간지로 발전하였다.

1899년 1월 22일에는 격일간≪時事叢報≫가 창간되었다. 발행인 겸 사주는 洪中燮이었고, 주필은 장지연이었다.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된 이 신문의 수명은 길지 못해서 이 해 8월 17일까지 100호를 낸 뒤에 폐간하였다.

1896년≪독립신문≫이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된 이래 2년 뒤인 1898년에는≪일신문≫·≪뎨국신문≫·≪황성신문≫이 나왔고, 그 한 해 뒤에는 다시≪시사총보≫와≪상무총보≫가 발간되는 등으로 일시에 여러 신문이 다투어 나타나 활기를 띠는 듯하였으나≪독립신문≫·≪일신문≫·≪시사총보≫그리고≪상무총보≫는 1899년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가운데서 황성과 뎨국 두 신문은 한말 대표적인 민간신문으로 1910년까지 발행되었다. 특히≪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제작되었고≪뎨국신문≫은 한글 전용을 고수하여 뚜렷한 특색을 나타내면서 발행되면서 앞으로 나타나게 되는≪대한일신보≫와 함께 항일적인 논조로 발간된다.

<鄭晋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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