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2) 한말 언론의 국권회복운동
  • (1)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

(1)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저항

한말의 민족언론은 일제의 한국침략, 즉 국권침탈에 저항하고 있었다.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한국식민지화 기도가 명백해지고, 특히 그 해 6월 황무지개척권 요구가 있자 신문들은 이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그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보안회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던 것이다.≪황성신문≫이 황무지개척권을 한국민에게 허가할 것을 주장한 것도 일제의 경제침략에 대한 반대였다.062)예컨대 1904년≪황성신문≫의 경우,<論山林澤認准說>(6. 20)·<請質政府諸公>(6. 29)·<開墾陳荒宜認許我民>(7. 4) 등의 논설에서 확인된다. 일제가 보안회의 움직임을 빌미로 군사경찰을 실시하며, 8월부터 한국인 발행의 신문에 대한 검열을 시행한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였다. 이 시기에 한국인의 명의로 발행되던 신문은≪황성신문≫과≪제국신문≫뿐이었다.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은 민족언론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11월 초 일진회의 보호청원이 발표되자≪제국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는 이를 반박하였으며,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에<是日也放聲大哭>을 검열을 거치지 않고 게재하여 정간되고 말았다. 이 논설은 잘 알려진 대로 한국민의 반일의식을 크게 고양시켰다. 이와 함께≪대한매일신보≫가 11월 21일자에<皇城義務>을 실어≪황성신문≫을 지지하였고, 11월 27일자로 이 문제에 대한 호외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 호외는 앞면에 한문으로<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 싣고, 뒷면에는<是日也放聲大哭>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던 것이다. 또≪대한매일신보≫는 1906년에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한 閔泳煥·趙秉世·宋秉璿 등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1907년 1월 16일자에는 고종이 을사조약에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는 밀서를 사진으로 게재하여 일본을 당혹하게 만들었다.063)이 옥쇄가 찍힌 밀서는 1906년 1월 말 영국 The Tribune의 특파원 스토리(D. Story)에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1906년 12월 1일의 The Tribune에 실린 사진을 복사하여≪대한매일신보≫에 실었던 것이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23일, 논설<스토리氏受書>와 1월 24일, 논설<更諭스토리氏受書> 참조). 다만≪제국신문≫은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에 대하여 11월 22·23일자에 걸쳐<한  분을 참으면 년 화근을 면이라>는 논설로, 국민에게 후일을 대비하여 실력양성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자중할 것을 촉구하였다.

1904년 8월 이후 일제의 사전검열로 한국인 명의로 발간되던≪황성신문≫이나≪제국신문≫, 그리고 1906년에 창간된≪만세보≫등은 직접적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이들 신문은 부분적으로 통감부의 정책을 비판하거나 일제의 주구로 알려진 일진회와 친일정권·정부고관들을 공격하고, 한국이 처한 위치를 설명하고 실력양성을 강조하여 한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국권회복의식을 고양시키는 등 간접적으로 일제침략에 저항하고 있었다. 1906년 한 해 동안 사전검열로 삭제된 기사가≪제국신문≫이 13건,≪황성신문≫이 7건,≪만세보≫가 6건이었는데,064)岩井敬太郞 편,≪顧問警察小誌≫(韓國 內部 警務局, 1910), 125∼128쪽. 그 내용은 대체로 간접적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인 명의의 신문과는 달리 영국인 명의로 발행된≪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직접적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을 비판하였다. 1907년 초 통감 이등박문은 일본에서 행한 연설에서≪대한매일신보≫가 가장 반일적인 신문이고, 그 영향력이 지대함을 시인한 바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065)≪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12일, 잡보<伊藤演說>. 또 당시 신문관계자가 독자들이 사전검열을 받지 않던≪대한매일신보≫만을 신뢰한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066)≪帝國新聞≫, 1907년 4월 9일, 잡보<丸山顧問과 各新聞記者>. 따라서 그러한 점을 고려하여≪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민족언론의 저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항쟁에 대해서 다른 신문들에 비하여 매우 호의적이었다.≪황성신문≫이나≪제국신문≫·≪만세보≫가 의병투쟁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 매우 비판적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었다.≪대한매일신보≫도 1906년 5월 30일자의 논설<義兵>에서는 의병투쟁이 때와 힘을 살피지 않은 폭거라고 규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이 계속되고 의병항쟁이 격화되자, 의병항쟁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1909년 7월 28일자부터 8월 1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義兵總大將 李麟榮의 略史>를 게재하였고, ‘지방소식’을 비롯하여 ‘의병소식’·‘의병상보’·‘의병정형’ 등의 항목을 만들어 의병활동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또 통감부의 조사에 따르면 의병들 가운데≪대한매일신보≫를 읽고 비분강개하여 의병에 가담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황성신문≫과≪제국신문≫도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었으나, 실력양성을 우선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대한매일신보≫는 실력양성을 중시하면서도 의병항쟁에 대해서도 적극 호응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진회나 친일대신 등 친일파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1908년 4월 2일자에<日本의 三大忠奴>와 같은 논설을 게재하여, 당시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宋秉畯(일진회)·趙重應(東亞開進敎育會)·申箕善(大東學會) 등을 비판한 것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대한매일신보≫가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반대하고 매국대신을 통렬히 비난하며 통감부의 식민지화정책 등을 비판하는 등 반일적인 논조를 견지하자, 일진회의 기관지≪국민신보≫나 이완용내각의 기관지≪대한신문≫등이 이를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대한매일신보≫는 친일세력의 신문에 대한 논박도 계속하였다.067)예컨대≪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10·11일, 논설<討國民新報>를 비롯하여, 같은 해 12월 17일, 논설<爲國民·大韓兩新聞招魂>, 12월 18∼22일, 논설<大韓新聞魔記者아 一覽>, 1908년 10월 9일, 논설<休矣休矣魔報여>, 1909년 5월 21·22일 논설<國民魔記者아>, 5월 23일, 논설<國民·大韓兩魔頭上各一棒> 등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비판적인 헐버트(H. B. Hulbert)나 매켄지(F. A. McKenzie)의 활동과 일본정책에 대한 비판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친일적인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포살사건이나 안중근의 이등박문포살사건, 李在明의 이완용살해미수사건 등에 관해서도≪대한매일신보≫는 적극적으로 보도하며 일제의 대한정책을 비난하였다. 일제침략의 선두에 섰던 인물들에 대한 의열투쟁을 국민에게 널리 알려 국권회복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1908년 3월 6일자부터는<官報>의 게재를 일시 중지하였는데, 일본인의 한국관직 임명으로 한국의≪관보≫가 일본인의≪관보≫에 지나지 않게 되었음을 강조하여 일제의 보호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068)≪대한매일신보≫의 반일언론에 대해서는 李光麟,<≪大韓每日申報≫ 刊行에 대한 一考察>, 268∼276쪽 참조.

이러한≪대한매일신보≫의 반일국권회복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자, 통감부에서는 일찍부터 베델의 추방공작으로 강경하게 대처하고자 하였다. 영국인을 발행인으로 하고 있던 이 신문에 대해서는 일제의 규제가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통감부에서는 신문지법의 제정과 개정으로≪대한매일신보≫의 규제를 시도하면서, 베델을 1907년 10월 9일 영국총영사관에 기소하였다.≪대한매일신보≫와≪Korea Daily News≫가 공중평화를 방해하고 인민을 정부에 반대하여 봉기하도록 격려하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069)구체적으로는 1907년 9월 18일의 논설<地方困難>과 10월 1일의 논설<貴重 쥴을 認여야 保守 쥴을 認지>, Korea Daily News 9월 21일<Where is the Master of Ceremonies?>등의 기사가 소요를 일으키거나 조장시켜 공안을 해친다는 내용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10월 14일의 재판 결과 10월 15일 베델은 유죄가 인정되어 6개월의 근신과 보증금의 공탁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추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더욱 반일적이 되어 한국민의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통감부에서는 다시 베델의 추방공작을 진행시켜, 1908년 5월 27일 베델을 영국의 淸·韓高等裁判所에 고소하였다. 고소 이유는 1908년 4월 17일자의 잡보<須知分砲殺詳報>와 4월 29일자 논설<百梅特捏(메테르니히)이 不足以壓伊太利>, 5월 16일자<學界의 花>가 질서문란·폭동격려·치안방해의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개정된 재판에서 베델은 유죄처분을 받아 3주간의 금고와 보증금의 납부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는 상해로 가서 금고형을 치렀는데, 이 일로 건강이 악화되어 신문사를 사임하였고 1909년 5월 사망하고 만다.

이처럼≪대한매일신보≫가 중심이 된 민족언론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인 명의로 발행되던 신문들은≪대한매일신보≫에 비하여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고 제국주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 등이 문제가 되었지만, 국권회복의 의지는 뚜렷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신문은 논설과 기사를 통하여 국민여론을 형성하고 국민계몽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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