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2) 한말 언론의 국권회복운동
  • (2) 국채보상운동의 주도

(2) 국채보상운동의 주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廣文社라는 출판사에서 金光濟·徐相敦 등에 의하여 발기되었다. 민간에서 이 같은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1904년 8월 제 1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일본인 재정고문이 고빙된 이래 급증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과 관계가 있었다. 특히 일제는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의 시정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한국침략에 소요되는 경비를 고율의 국채를 起債하고 일본차관으로 조달하였던 것이다. 1907년 초 한국정부의 대일차관은 1,300만 원에 이르렀는데 그 액수는 정부의 1년예산과 맞먹는 정도였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국채보상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김광제 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2천만 동포가 3개월 동안 금연하여 모금한 돈으로 민간에서 국채를 보상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곧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2월 말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에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070)국채보상운동 전반에 관해서는 愼鏞廈 외,≪日帝經濟侵略과 國債報償運動≫(亞細亞文化社, 1994)를 참조할 것.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언론의 역할은 崔埈,<國債報償運動과 프레스 캠페인>(≪白山學報≫ 3, 1967;≪韓國新聞史論攷≫, 一潮閣, 1976)과 鄭晉錫,<國債報償運動과 言論의 역할>(≪日帝經濟侵略과 國債報償運動≫)에 상세하다. 이하의 논의는 이들 연구를 주로 참조하였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른 시간에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언론활동에 크게 힘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에서 발간되던≪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등은 2월 광문사에서 국채보상을 결의한 사실을 보도한 이래 이 운동의 확산에 진력하였다. 즉<國債一千三百萬圓報償趣旨書>·<國債報償期成會趣旨書> 등을 소개하고, 논설로 국채보상운동의 중요성과 함께 그 참여를 촉구하였던 것이다.≪황성신문≫과≪만세보≫는 즉각 신문사에 모금처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동참하였으나,≪제국신문≫과≪대한매일신보≫는 그러한 움직임을 찬양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들어 의연금의 수납을 하지 않고자 하였다. 즉≪제국신문≫은 1907년 2월 28일자부터 3월 5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국보상금모집에 관 졍>을 게재하고, 3월 2일자 잡보에는<收金謝絶理由>를 밝힌 바 있었다. 또≪대한매일신보≫도 3월 1일자에<한人忠愛>를, 3월 6일자에<國債報償>이라는 논설을 싣고, 3월 5일자부터 광고로 의연금을 수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보내 오는 의연금은 명단과 금액을 신문에 수록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 신문들도 계속 확대되는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방관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주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신문사내에 모금처를 설치하고 신문이 그 참여를 촉구하였으며, 기성회 등의 취지서와 의연금납부자의 명단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국채보상운동에는 고관이나 양반·부유층뿐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부녀자로부터 상인·군인·학생·기생·승려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여성들의 참여도 놀라워, 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와 가락지 등을 의연품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일본유학생들과 미주와 노령의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 왔고, 일부 외국인들도 참여하였다. 황제와 정부대신들도 금연을 하고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민의 전폭적인 호응으로 모금이 시작된 지 3개월 뒤인 5월에는 약속된 모금액이 20만 원에 달하였다.≪대한매일신보≫는 여러 차례 부록을 발행하면서까지 의연금 납부자의 명단과 금액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모금은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바로 일제의 방해 때문이었다.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이 그 발기 직후부터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공작을 전개하였다. 즉 국채보상 관련기구의 지도부에 압력을 가하였으며,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였다. 그 발행인 영국인 베델의 추방공작을 전개하면서, 1908년에는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는데, 양기탁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후 국채보상운동의 지도부는 모금보다도 모금액의 보관과 조사, 감독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모금된 의연금의 처리를 위하여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직되어, 그 기금을 교육사업에 쓰자고 논의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모금된 금액은 대략 20만 원 내외였던 것 같다.

국채보상운동에 있어 신문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 의연금의 대부분이 신문사를 기탁처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1909년 7월 일본군헌병대에서 조사한 의연금 총액은 다음과 같았다.071)鄭晉錫, 위의 글, 214∼215쪽.

대한매일신보   36,000여 원
 신보사내 총합소   42,308원 10전
황성신문   82,000여 원
제국신문   8,420원 6전
만세보-대한신문   469원
국채보상기성회   18,700원 22전 7리
총계   187,787원 38전 7리

이 자료의 정확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전체 모금액의 90%가 신문사 또는 신문사내의 모금처로 납부되었다는 사실은 신문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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