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3) 일제의 언론규제
  • (1) 사전검열

(1) 사전검열

일제의 언론규제는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 이후부터였다. 일본은 군사관계의 내용과 외교문서의 신문게재 금지를 외부를 통하여 여러 차례 요청한 바 있었다.080)鄭晉錫,<民族紙와 日人經營新聞의 對立>(≪韓國言論史硏究≫, 一潮閣, 1983), 25∼27쪽. 뿐만 아니라 1904년 4월에는 신문검열관의 설치를 한국정부에 요구하기까지 하였다.081)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편,≪舊韓國外交文書≫日案 7(高麗大 出版部, 1972), # 7957<韓國新聞의 日軍行動揭載의 禁止 및 同檢閱官撰任要求>. 이미 1900년대 초기부터 정부에 제기된 신문규제문제가 일본과 직결된 적이 적지 않았는데,082)鄭晉錫, 앞의 글(1983), 24∼25쪽. 그것은 일본의 한국침략 기도를 한국신문들이 예리하게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일제는 러일전쟁 이후 군사력을 동원하여 한국인 명의로 발간되던 신문들에 대한 사전검열을 실시하였다. 즉 1904년 8월 20일≪제국신문≫과≪황성신문≫의 주무원을 불러 군사상 사항의 신문게재 금지와 신문의 사전검열을 통고하였던 것이다.083)≪大韓每日申報≫, 1904년 8월 23일, 잡보<신문검열>. 이보다 일찍 7월 20일자로 한국주차 일본군사령관은 서울시 내외에 일본 군사경찰의 실시를 일방적으로 외부에 통고하였는데, 그 가운데 “집회 또는 신문이 치안에 방해된다고 인정되는 것은 정지시키고 관계자를 처분할 사. 단 신문은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함을 요함”이라고 하여 치안방해로 인정되는 신문의 정지 및 관계자의 처벌과 사전검열을 명시하고 있었다.084)≪舊韓國外交文書≫日案 7, # 8226<京城內外 日本軍事警察實施通告>.
金正明 편,≪朝鮮駐箚軍歷史≫(巖南堂書店, 1967), 211∼212쪽.
이 일본 군사경찰의 실시는 그 해 6월 말 일제가 한국정부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한 것에 대하여, 7월에 한국민이 輔安會를 결성하여 그 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085)이에 관해서는 尹炳奭,<日本人의 荒蕪地開拓權要求에 대하여>(≪歷史學報≫22, 1964)와 愼鏞廈,<구한말 輔安會의 창립과 민족운동>(≪한국사회운동의 기반과 새 경향≫, 문학과지성사, 1994)에 상세하다. 즉 일제는 일본 군사경찰의 실시를 한국정부에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한 달 만에 한국인 명의로 발행되는 신문에 대한 사전검열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당시≪제국신문≫과≪황성신문≫ 이외에≪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은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던 영국인 베델이었기 때문에 사전검열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그런데 10월 9일자 일본군의<군정시행에 관한 內訓>에서도 7월 20일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즉 “집회 혹은 신문·잡지·광고 등의 치안에 방해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은 이를 해산 또는 금지시킬 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내훈이 있던 10월 9일≪제국신문≫이 일본군헌병사령부에 의하여 정간처분을 받았다.≪제국신문≫1904년 11월 9일자 논설<본신문 뎡지얏던 졍>을 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거월(10월) 구일 일요일에 신문을 방쟝 발간 즈음에 하오 시량에 일본헌병령부 위관 일인과 하 일인과 헌병 오인과 통변 일인이 와셔 령부 명령으로 말기를 본월 칠일 뎨국신문 논셜의가 일본군샹에 방요 한일량국교졔에 방요 치에 방되 말을 얏스니 신문을 뎡지라고 방쟝 졀반즘 인쇄던 신문과 긔계고동을 셔 고봉고 가지라…

이 논설에 따르면 신문의 사전검열이 일본군의 통고가 있은 8월부터 시행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10월 이후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기사의 삭제와 정간처분이었다.

1904년 하반기부터 일제에 의하여 자행된 사전검열은 1905년 2월 이후 警務顧問部로 이관되어 계속되었다. 경무고문부는 1905년 2월 4일 丸山重俊이 경무고문에 취임하면서 개청한 것으로, 일본군사령부의 사전검열 업무를 인계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신문에 반일기사를 게재하면 한국민의 반일의식이 확산될 것이므로 반일적인 기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전검열의 과정은≪제국신문≫ 1906년 3월 21일자 논설<停報와 解停>에 잘 나타나 있다.

신문을 일 편즙야 박힐 에 경무고문실에 가셔 검열을 것친 후에야 인쇄 만일 검열 일인이 그로 인가면 그로 박히고 무삼 귀졀이던지 지 말라고 살을 쳐주면 부득이 야 그 귀졀은 그  뒤집어 박히 만일 그 리에 다른 말을 우랴면  검열을 밧아야  터인데 양 날은 져물고 울 멀도 업셔셔 남이 알아 볼 슈 업시 되 것인…글를 뒤집어 놋 에 혹 뒤집어 노키도 고 혹 그져 두기도 야…

즉 사전검열은 인쇄한 신문臺帳을 경무고문부에 가지고 가 검열을 받고, 검열에 걸리면 그 부분은 활자를 뒤집어 인쇄하거나 공백으로 인쇄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벽돌신문’이었다. 사전검열에 대하여 독자층은 일본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실어도 한국신문에서는 검열로 삭제된다고 하여≪대한매일신보≫밖에 볼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086)≪帝國新聞≫, 1907년 4월 9일, 잡보<丸山顧問과 各新聞記者>. 독자층의 신뢰 감소 또는 불신은 신문의 재정난을 가중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전검열과 행정처분은 러일전쟁이 진행되던 1904·5년에 국한되지 않고 있었다. 1907년 7월 ‘光武新聞紙法’의 제정은 이 같은 규제를 법제화한 것이기도 하였다.

1906년 7월에 이르면 경무고문부뿐 아니라 한국정부에서도 신문규제를 시도하였다. 중추원에서 신문조례를 심의하여 곧 반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팽배하였던 것이다.087)≪萬歲報≫, 1906년 7월 6일, 잡보<新聞條例制定說>. 그것은 신문이 정부의 무능과 부패, 친일정권과 관련된 정치문제와 관리들의 비행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한국정부에서 신문규제법을 준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신문규제법은 반포되지 않았다.088)崔起榮, 앞의 책(1991), 255∼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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