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Ⅰ. 근대 언론활동
  • 3. 언론의 구국투쟁
  • 3) 일제의 언론규제
  • (2)<신문지법>의 제정

(2)<신문지법>의 제정

1907년 4월부터 통감부에서는 신문규제법의 제정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통감 이등박문은 한국정부 대신들과의 정례모임에서 신문규제법의 제정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통감부에서 신문규제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국채보상운동의 주도를 비롯한 민족신문의 국권회복운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통감부와 친일정권에서는≪대한매일신보≫의 적극적인 반일언론활동과 정부비판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특히 통감부에서는 1906년부터 비밀리에 배델의 추방공작을 획책하고 있었으나 영국정부와의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월 16일자에 고종이 을사조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밀서를 게재하여 일본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 바 있었다.

따라서 이등박문은 1907년 5월 30일에 한국정부 대신들과 가진 ‘韓國施政改善에 관한 협의회’에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뿐만 아니라 일본인 및 영국인이 국내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대해서도 규제할 수 있는 신문규제법이 필요함을 강조하였고, 6월 18일의 같은 모임에서는 법안의 초안을 한국정부에 전달하였다.089)≪日韓外交資料集成≫ 6-상(東京;巖南堂書店, 1964), 488·525∼526쪽. 신문규제법의 초안은 주로 일본의 신문지조례에 기초한 것으로 체형과 벌금, 행정처분과 사법처분을 포함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문규제법이 한국정부의 발의로 법안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통감부에서 법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090)崔起榮, 앞의 책(1991), 257∼268쪽 참조.

법률 제1호<신문지법>은 1907년 7월 24일자로 반포되었다. 7월 24일은 흔히 ‘丁未七條約’이라 불리는<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顧問政治라고 불리던 일제의 내정간섭 형태가 次官政治로 옮겨 가던 시기였다. 바로 7월 18일에 있은 고종의 황태자양위가 7월 20일 일제에 의하여 고종의 퇴위로 바뀌면서 한국의 정국이 혼란에 빠진 직후였던 것이다. 7월 27일자로 법률 제2호<保安法>이 반포되고, 8월 1일 군대해산이 이루어졌다.

<신문지법>은 부칙 3개조를 포함하여 모두 38개조로 되어 있었다. 제1조부터 제10조까지는 신문발행의 수속과 관련된 일반규칙이었다. 발행허가의 절차, 신문사 임원의 자격, 보증금, 발행사항의 변경, 납본 등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제11조부터 제16조까지는 신문게재를 금지하는 사항이 언급되었고, 제17조부터 제20조까지는 필수 게재사항이었다. 제21조부터 제35조까지는 신문의 법률위반에 대한 처벌조항이었으며, 제36조부터 제38조까지는 부칙조항이었다. 그 중요한 내용을 보면, 먼저 신문의 발행은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부대신은 安寧秩序·風俗壞亂이라는 막연한 범위를 규정하여 신문에 대한 발매·반포의 중지와 압수, 발행의 정지와 금지를 행정처분으로 명령할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신문지법>이 신문을 정부의 통제하에 두고자 제정되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보증금 300환의 납부 또한 재정이 취약한 한국인 발행신문에 대한 간접적인 탄압조항이었다. 한국정부에서도 이 조항이 과중함을 인식하여 통감에게 그 수정을 건의한 바 있었으나,091)≪日韓外交資料集成≫ 6-상, 556쪽.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전검열을 의미하는 납본은 이미 언급한 대로 1904년 10월경부터 실시되고 있었다. 신문게재 금지사항으로는 황실존엄의 모독, 국헌문란, 국제교의의 저해 등이 내용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반일관계 기사의 게재를 금지하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보도관제조항에는 기밀에 관한 공문서와 기사가 해당되었다.<신문지법>의 규정을 위반할 경우의 처벌은 관련자의 벌금형과 체형 혹은 인쇄기계의 몰수 등과 신문의 압수·정간 등 가혹한 행정처분이 주를 이루었다.092)崔起榮, 앞의 책(1991), 266∼277쪽 참조. 신문지법의 대부분 조항은 일본의 신문지조례(1883년 제정, 1887·1897년 개정)를 그대로 번역하거나 수정한 것이었다. 특히 허가제나 내부대신의 행정처분권과 같은 조항 등은 신문지조례의 개정에서 삭제되었던 부분인데, 신문지법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즉 신문지조례에 설정된 적이 있던 조항 가운데 신문탄압과 직결되는 강력한 조항은 일본에서의 완화와는 무관하게 우선적으로 포함시켜, 법 제정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쉽게 짐작케 한다.093)일본 신문지조례와 대한제국의 신문지법의 비교에 관해서는 崔起榮, 앞의 책(1991), 274∼276쪽 참조.

<신문지법>의 제정에 대하여 민족신문들의 반발은≪황성신문≫이 법령 반포 전인 7월 12일자에<新聞條例에 對 感念>을 싣고, 이어 10월 11일자의 논설로<新聞束縛의 條例>에서 “吾輩 政府에셔 此等條例를 速히 繳鎖던지 경히 刪定야 人民의 言論自由를 許고 束縛的 主意 除去야 開明의 前途를 發達케 을 希望노라” 하여 그 폐지나 개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신문지법>에 대한 여론은 “이제 더러케 다로온 법을 마련엿스니 신문이 엇지 졍부관리의 득실과 일반인민의 션악을 의론리오 이졔 신문긔쟈 노릇 슈도 업슬 것이오 신문이라고 볼 것도 업스리라”는 반응이었다.094)≪帝國新聞≫, 1907년 8월 8일, 논설<신문지법을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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