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1. 유교
  • 2) 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유교개혁사상
  • (3) 심학(양명학)파의 유교개혁사상

(3) 심학(양명학)파의 유교개혁사상

朴殷植(白巖, 1859∼1925)은 청년기에 정약용의 저술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동시에 평북 태천에서 활동하던 화서학파의 도학자인 朴文一(雲菴)·朴文五(誠菴) 형제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는 1898년 40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애국계몽사상가로 전환하였다. 장지연과 더불어≪황성신문≫과≪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활동하고, 신민회·서북학회의 조직과 서북협성학교 설립 등에 종사하였으며, 1909년 51세 때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과 유교개혁운동에 나섰다.

그의 초기 저작인≪謙谷文稿≫(1901) 속의<종교설>은 당시 사회의 당면과제 가운데서 종교문제를 절실한 것이라 강조하고 ‘교(宗敎)’를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정립하심으로써 만민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라 하여 유교적 종교개념을 제시한다. 성인의 말씀을 매개로 하여 위로 하늘의 명령과 아래로 인간에 대한 교화를 일관시키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유교의 종교적 근거를 마음의 개념적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곧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우주의 통일된 질서를 제시하는 心學(陽明學)적 이해 위에서 유교의 종교적 인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박은식은 종교를 도덕의 학문이라 하고 일반과목의 학교(諸科學校)를 경제의 방법이라 구별하면서, 종교와 일반교육의 양자를 병행시킬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교육을 중심으로 유교조직을 지탱하고자 하는 전통적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먼저 정부로부터 분리시켜 유림에 의한 자립을 추구하고, 동시에 지식층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대중 속으로의 확산을 추구하는 두 방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교육을 중심으로 유교조직을 지탱하고자 하는 전통적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먼저 정부로부터 분리시켜 유림에 의한 자립을 추구하고, 동시에 지식층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대중 속으로의 확산을 추구하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박은식이 추구한 유교개혁론은<儒敎求新論>에서 세 조목으로 집약되는 핵심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유교가 개혁하지 않으면 융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면서 “차라리 여러 선배에게 죄를 받고 유림파에 노여움을 얻을지언정, 차마 공자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을 참을 수는 없다”고 하여 자신의 유교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그가 제시한<유교구신론>의 3대 문제를 요약하면, 군주중심을 벗어나 인민중심에로의 전환과 소극적 폐쇄성을 벗어나 적극적 전파활동 및 간단하고 절실한 양명학의 추구이다.117)박은식,≪朴殷植全書≫ 中, 儒敎求新論(檀國大 출판부, 1975), 44∼48쪽. 다시 말하면 민주적 사회의식과 행동적 선교방법 그리고 주체적 신념의 교리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유교구신’에서의 ‘신’은 서양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교의 고유한 빛이라 지적한다. 곧 공자의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안다(溫故而知新)”라 하고, 張橫渠가 “낡은 견해를 씻어 내어 새로운 의식을 부른다”고 하는 ‘신’으로서, “도덕은 ‘날로 새로워짐’으로써 빛나고, 국가의 명맥은 ‘새롭게 함’으로써 길어진다”고 확인한다.118)위와 같음(48쪽).

박은식은 자신의 유교적 신념으로서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王陽明實記≫(1910)를 저술하여 자신의 양명학적 신념을 확립한 뒤, 1909년 9월 11일 장지연 등과 대동교라는 명칭의 종교단체를 조직하였다.119)愼鏞廈,≪朴殷植의 社會思想硏究≫(서울대출판부, 1982), 201∼206쪽. 같은 해 10월 10일(음력 8월 27일) 대동교회 종교부장의 직책으로<孔夫子誕辰紀念講演>에서 대동교의 배경과 종지 및 발전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대동-소강’의 사회질서와 ‘據亂世-升平世-太平世’의 역사변천을 통해 공양학파 내지 금문학파를 형성하는 강유위의 대동사상을 수용한 것이다.

박은식에서 대동교운동은 양명학과 강유위의 대동사상을 우리 사회의 시대적 현실 속에서 유교개혁사상의 독특한 모범으로 계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교개혁사상은 우리의 민족의식과 새로운 서구문물의 수용을 위한 개화사상을 조화시키고 있는 애국계몽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 양명학과 관련되는 인물로서 개성출신의 金澤榮(滄江, 1850∼1927)을 들어 볼 수 있다. 그는 20대의 청년시절에 강화학파의 계승자인 李建昌(寧齋)과 교유하였으며, 이 시대 대표적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왕양명의 학설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으나, 왕양명의 격물설에 대해서는 명백히 반대하였다. 또한 개성의 학자 金憲基가 왕양명이 氣를 理로 오인하였다 하고 良知를 氣로 보았다고 비판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는 결코 양명학을 표방하는 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格物解>에서 주회암과 왕양명 사이에서 나타난 격물설의 차이를 주목하면서, 誠意를 행위에서 앞서는 것이라 보고, 格物致知도 그 속에 포함된 것이라 봄으로써, 두 입장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그는<大學古本私箋>을 지은 것도 양명학과의 일정한 연관성을 보인다.120)劉明鍾,≪韓國의 陽明學≫(동화출판공사, 1983), 218∼223쪽. 여기서 저자는 金澤榮을 순수한 양명학도가 아니라 소극적 동조자로 인정하며, 詩文에서도 泰州學派를 이은 性靈派가 아니라 神韻派에 속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김택영은<儒道無用於競爭之世論>에서 유교를 다른 종교인 불교 및 기독교와 비교하면서, 유교만이 천하국가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고, 살리고 죽임을 주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경쟁시대의 허위와 폭력에 유교가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무용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공자의 정신이 仁義의 불변적 도리(經)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적응(權)이 조화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시대에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밝히고 있다. 유교와 서양종교를 비교하면서, 유교의 인륜(秉彛)은 의리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고, 서양종교의 자유는 혈기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라 대조시킨다. 따라서 의리를 지키는 자는 천하에 드물고 혈기를 따르는 자는 무수히 많아 경쟁시대에 자유가 득세하는데 반하여, 인륜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있는 것이라 지적하기도 한다.121)金澤榮,≪金澤榮全集≫2, 儒道無用於競爭之世論·雜言 3(아세아문화사, 1978, 77∼81쪽, 109∼110쪽). 그는 또한 공자의 정치사상을 전제정치라는 비판에 대해, 군신 상하의 질서를 잃은 상태인 ‘專制’와 군신 상하에 각각이 제자리를 지니는 ‘명분’을 대립시키면서, 명분의 보편적 원리에 따라<춘추>의 대의요 대법이 오늘의 입헌이요, 요와 순 사이의 禪讓이 오늘의 공화라고 밝힌다.122)金澤榮,≪金澤榮全集≫2, 孔子專制辨(103∼105쪽). 여기서 그는 유교가 우리 시대에 자기변혁을 통하여 새롭게 발휘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