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2. 불교
  • 2) 문호개방과 한국불교

2) 문호개방과 한국불교

문호개방으로 일본의 침략세력들이 밀려오기 시작할 무렵 한국불교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던가. 학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의 불교를 가리켜 ‘타성적 수난의 시대’124)姜裕文,<最近百年間朝鮮佛敎槪觀>(≪불교≫10호, 1932).니 ‘가까스로 殘喘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125)權相老,≪朝鮮佛敎史槪說≫(1929), 53쪽.니 하는 평들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만큼 이 시기의 불교는 혈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되었던 일종의 암흑기였다. 양반관료들로부터 아전에 이르기까지 침학이 혹심한 가운데 사회적 신분이 땅에 떨어져 있던 시대. 그리하여 심지어는 ‘宗乘도 없고 宗統도 없었다’126)高橋亨,≪李朝佛敎≫(1929), 895쪽.는 혹평과 함께 七賤이니 八賤이니 하였을 만큼,127)이것은 그 때 불교의 위상이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던 일곱 가지 賤役 가운데 하나에 포함이 된다는 뜻인데, 이에 대해서는 그 부당성을 논증한 연구가 있다(정광호,<日本 침략초기의 한국 佛敎>,≪李智冠스님 華甲記念論叢 韓國佛敎文化思想史≫, 1992) 참조. 이 시대 불교의 위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문호개방 시기 한국불교의 이와 같은 위상을 가장 잘 상징하고 있던 것은 알다시피 승려에 대한 ‘도성출입 금지’의 악법이었다. 승려는 서울 장안 4대문의 출입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놓고 있던 악습이다.≪經國大典≫이하 역대 임금들의 敎命 가운데 이것과 관련되는 기사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정조 때 把溪寺에 龍坡라는 고승이 있었다. 그가 승려들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각종 잡역의 혁파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그가 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울 장안 4대문을 출입해야 되겠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이 때는 승려들의 출입을 완강히 막아 놓고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로 궁리 끝에 俗服에 솔상투(솔잎으로 짠 상투)를 틀고 물장사를 하면서 일을 해냈다.128)洪月初,≪奉先寺本末寺誌≫(1927) 중 87∼106쪽의<水落山內院庵誌>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순조 때 일로 秋史 金正喜와 大興寺의 草衣, 그리고 화가 小痴 許維로 이어지는 화단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즉 초의가 일찍이 소치의 재질을 간파하고서 그를 추사에게 소개하기 위해 서울 사는 추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역시 초의는 성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동대문 밖의 淸凉寺에 기거하면서 추사와 교류를 하였다.129)金東銑,<남농 허건 가문>(≪名家의 條件≫, 1986), 219∼241쪽.

이 밖에 도성출입에 대한 금령이 풀어진 지 3년 만인 1898년(광무 2)에 圜丘壇에서 郊祀를 지내는데, 어떤 중이 방갓을 쓰고 구경을 하다가 임금과 시선이 부딪힌 사건이 나자 또다시 금령이 내려졌다.130)李能和,≪朝鮮佛敎通史≫하(1917), 927쪽. 그리고 金九의≪白凡逸志≫에는 이 무렵 백범이 麻谷寺의 승려 신분으로 서울을 거쳐 북방으로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역시 성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외곽지대로 돌아 북상을 하였다는 회고담이 있다.131)金 九,≪白凡逸志≫(1989), 134쪽, 이≪백범일지≫는 그 동안 원본의 영인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판본이 있어 왔다.

요컨대 19세기 후반의 불교는 사람으로서의 인권이 거의 무시된 상태에서 가지가지의 침탈과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시 각종 잡역과 誅求討索에 시달림을 받고 있던 것이 또한 그 때의 한국교단이었다.132)정광호, 앞의 글 참조.

그러나 조선 후기의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이, 일본인들이 밀려온 뒤의 교단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점만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개화기의 한국불교는 대부분이 好日 내지는 附日의 경향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의 이러한 경향은 바로 위와 같은 사회적 배경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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