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2. 불교
  • 3) 개화운동과 불교

3) 개화운동과 불교

문호개방 시기의 불교가 위에서 말한 대로 무기력한 침체 속에 빠져 있을 때 교계에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開化黨의 핵심 가운데 불교인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화당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金玉均을 필두로 하는 洪英植·徐光範 등 20대의 소장 기예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 약관의 양반출신 급진개혁파 인사들을 지도하고 있던 사람이 바로 劉大致(鴻基)인데, 그는 이 때 학식과 인격이 아울러 고매하던 中人출신의 은군자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 밖으로 나와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닌 까닭에, 그 때 이른바 ‘白衣정승’이란 별칭으로도 존경을 받고 있었던 선각자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대치란 선각자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가 불교와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사상적 바탕은 어디까지나 불교요, 따라서 그 때 개화파 인사들의 사상적 기초도 대부분은 불교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유대치가 전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한 학자는 물론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저술이 없으니 그가 어떤 종류의 經·論을 연구한 사람인지 알 수 없고, 또 그의 법력을 가늠할 만한 근거도 분명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佛敎通史≫에 ‘好談禪’이라 했으니 그는 주로 선을 좋아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의 저술이 없다는 것도 실은 괴이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선의 속성은 흔히 말하듯이 ‘不立文字 直指人心’이 그 특색이오, 따라서 역대의 禪客들에게 저술이 별로 없는 것과도 유대치의 경우는 매우 흡사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호를 ‘如如’라고 했던 점으로 보나, “金玉均·徐光範… 등의 양반집 자제들과 육식을 하는 인사들이 그로부터 禪理를 듣고 발심을 하게 됐다”133)이능화, 앞의 책, 898쪽.는 점으로 보나, 또 혹은 李淙遠이라는 거사가 ‘如如(곧 유대치)를 따른다’는 뜻으로 ‘隨如’라는 호를 썼다는 점으로 보나, 그의 禪旨는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가 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그 때 서울서는 김옥균뿐만 아니라 吳慶錫 기타 많은 인사들이 역시 그에게서 禪을 배우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하여 “선풍은 한때 서울을 풍미하게 되었다”는 표현도 있는 것을 보면,134)위와 같음. 그의 지도적 위치는 높이 살 만하다. 다만 유대치는 李東仁에게서 불전을 배웠다는 말만 있을 뿐,135)古筠紀念會,≪金玉均傳≫상. 엄격한 의미의 ‘師資相承’이 없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랄 수도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한국불교의 선맥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되어 있던 상태라, 전문적 수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뚜렷한 師資관계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한 일인 것이다.

사실 그 때의 한국 선맥은 卍海 한용운도 말하고 있듯이,136)韓龍雲,<鏡虛禪師略譜>(≪鏡虛集≫, 1943) 1∼2쪽. 오랫동안 끊어져 있다가 1879년(고종 16) 鏡虛 惺牛의 悟道를 계기로 다시금 재생이 된다는 것이 오늘날 교계의 상식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880년 경허는 법맥을 스스로 龍岩이라는 선사에게로 연결시키고 있는데,137)위와 같음. 바로 이 때부터 한국 선풍은 사실상의 중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허가 한국 선풍의 중흥조로 추앙을 받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사자상승’이란 경허같은 특별한 인물이 나와서 획기적인 평가를 받은 뒤에나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유대치의 사상적 기초는 불교요, 따라서 그 문하에 있던 인사들의 사상이 역시 불교였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비중이 가장 컸던, 이를테면 대표격이 되는 김옥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김옥균 역시 전문적 수도인은 아니었다. 따라서 교학상 주목할 만한 업적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언제나 일상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입증된다. 우선 그는 즐겨 古筠頭陀라는 별호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두타’란 ‘번뇌의 티끌을 없애고 청정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하는 범어인데, 불제자 가운데 大迦葉은 바로 그 ‘두타제일’의 호칭을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서법에도 깊은 조예가 있던 사람인데, 그가 남긴 작품들을 볼 것 같으면 거의 불전 기타 어록들에서 끌어다가 쓴 것들이 많다. 그 중에는 물론 보통 심상의 어록도 있지마는, 가끔은 아래와 같이 아주 고급 偈頌에 속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은 주목되는 점이다.

詞鋒·探草…이런 것은 다 글장난에 불과한 것

喝 소리 한마디면 대번에 알아야지

큰 바다 맑고 깊어 만상을 적시나니

牛跡138)‘소의 발자국’이란 뜻인데, 이는 衲子가 참선 수행을 할 때의 어떤 단계를 말한다. 즉 참선 공부의 여러 단계를 소(牛)를 찾는 일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그림 (곧 尋牛圖) 가운데의 어떤 대목을 가리키는 말이다.만을 보고서 공부의 심천을 논하지 말라

 

詞鋒探草辨當人

一喝須知僞與眞

大海淵澄涵萬象

休將牛跡比功深

 (예술의전당,≪韓國書藝一百年展圖錄≫, 1988, 14쪽)

이 작품은 첫 귀에 ‘辨當人’139)‘辨當’이란 말은 일본어의 집 밖에서 먹기 위하여 가지고 가는 음식의 뜻. 轉하여 집 밖에서 먹을 때에 타인에게 가져오게 해서 먹는 움식. 여기서는 자기의 체험이 아닌 남의 글로 된 저술이나 문자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이란 문자가 있어 일본 어떤 선사의 게송인 것만 짐작할 뿐 아직 상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김옥균이 하필 이 작품을 선택해 썼다는 데는 어쨌든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법하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평소 이 작품에 어떤 애정이 있었기에 가져다가 쓴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김옥균의 사상 기초에는 불교가 큰 비중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한 것이다.

다음은 吳慶錫 세 형제의 불교에 관한 것인데, 여기에도 물론 그들의 사상을 가늠할 만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오경석의 아들인 吳世昌이 또한 불교에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저간의 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오세창은 아다시피 3·1운동 때 천도교의 핵심이었던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는 불교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와 함께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이것은 일견 뜻밖의 사실로도 생각될 수 있겠으나, 그가 쓴 款識에 가끔 ‘削髮老俗漢’이란 것이 있고, 또 그의 낙관 중에는 萬法歸一·無上乘·如是·百劫餘生·是甚麽·眞住庵印·龍華香徒·小自在·眞主人庵·鴻爪 등등 명백하게 불교를 상징하는 문자도 꽤 많이 있다.140)吳世昌,<吳世昌 印譜>(≪槿域印藪≫, 국회도서관, 1968) 부록. 뿐만 아니라 그의 친필로 된 ‘阮堂般若心經 跋文’141)阮堂 金正喜의<般若心經>은 3∼4종이 있는데, 이 중에서 吳世昌이 발문을 부친 것은 大興寺藏 楷書本으로 (草衣禪師에게 써 준 작품이라는 것) 현재 그 영인본이 항간에 유통하고 있다.을 볼 것 같으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실감난다.

…(이 글을 보고 있노라면)… 古香은 향기롭고 妙旨도 깨우쳐서, 色과 空, 垢와 淨에 걸림이 없게 되니, 나와 같은 범부에게도 일찍이 上般若 夙因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후세의 동호인들도 응당 기꺼이 信受 봉행을 할 것이로다(의역).

이 정도의 조예와 신심이 있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듯 싶다.

이 밖의≪佛敎通史≫에는 언급이 없으나, 大痴 문하의 엘리트 중에는 또 白春培가 있는데 이 사람도 사상은 불교였음이 확실하다. 그는≪인명사서≫에도 수록이 돼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개화파 인사로서의 비중은 적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젊은 나이로 요절을 하였을 때 柳瑾·張志淵 등의 애사142)張志淵,<弔白小香韻>(편자미상,≪名家筆譜≫, 목판영인본 6권 74쪽).가 적잖은 분량으로 남아 있음을 미루어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 중의 일부를 들어 보면 이런 것이 있다.

높고 훌륭하며 강개한 뜻이 있어

西歐의 문명들을 두루두루 보았건만

평생에 품은 뜻 펴지를 못했으니

가신 뒤엔 그 이름만 외로이 남았구료

그렇다면 백춘배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가. 대충 설명을 해보자면 그는 대개 이런 인물이었다.143)위≪名家筆譜≫목록 설명 중의 “早有當世之志 東遊日本…”의 글이 있다.

…그는 일찍이 當世의 뜻이 있어서, 일본과 러시아 등 각국을 유력하면서 그들의 유신제도와 문물·풍토를 살피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일변 개혁사상을 고취하면서 그는 김옥균과 함께 萬言疏를 올리는 등 힘써 국가유신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도리어 時諱에 걸려서 피체, 옥중에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비명에 가니,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백춘배의 사상 기초가 역시 불교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몆 가지 상황을 미루어 짐작이 되는데, 우선 呂圭亨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여규형과 함께 古歡堂 姜瑋(1820∼1884)에게서 시를 배웠다고 한다.144)呂圭亨,<弔白小香文>(≪名家筆譜≫6권) 참조. 강위는 아다시피 조선 후기의 秋史와 함께 대표적인 ‘在家人’ 중의 한 사람이오,145)李能和, 앞의 책, 하 897∼899쪽 阮堂歡堂爲禪悅文 참조. 여규형(1849∼1922)은 그 때 교단내의 금석문들을 가장 많이 썼던 문사로서 이름이 높던 사람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 속에 교유하던 백춘배가 또한 불교를 좋아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가 유대치의 문하로 ‘香山居士’라는 별호를 썼다든지, 또 혹은 그에 대한 추모사 가운데, “그대는 道를 배워 융통자재하였으니, 명예니 굴욕이니 하는 것이 안중에나 있었을까.”146)李鼎煥<弔白小香韻>(≪名家筆譜≫6권) 중의 “子旣學道得環中…”. 등의 귀절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더욱 그러하다. 이 밖에 여타의 개혁파 인사들의 사상도 정도 차이는 있었으나 대부분 모두가 불교였다. 이능화의 ‘一時禪風 盛行京城’147)李能和, 앞의 책, 898쪽. 이라는 표현도 아마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교와 그 때의 유신운동과는 어떠한 연관을 가지는 것인가. 교학상에서 불교를 보면 거기에는 물론 여러 가지 명제가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비중이 큰 것을 들면 그것은 아마도 ‘一切衆生 悉有佛性’에 입각한 만인평등주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명제를 전제로 하고서 세상을 본다면 그 때 조선사회에서와 같은 엄격한 양반·상인의 구별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김옥균의 언설 가운데도 이와 같은 불평등주의의 타파를 역설하고 있는 대목이 더러 눈에 뜨인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만치 그가 이러한 논리를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 당시 양반사회의 부패와 비리를 고발하지만 다음과 같이 아주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을 뿐이다.

방금 세계가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생업의 多를 競할 時에 당하여 양반을 除하여 弊源을 芟盡할 사를 務치 아니하면 국가의 멸망을 기대할 뿐이오니(鈴木省吾 編,≪朝鮮名士金氏行錄≫, 東京, 1886, 109쪽).

그리고 김옥균이 일본망명중에 토로하고 있는 언설들을 볼 것 같으면, 그는 유가사상의 ‘형식적인 위계질서’에 염증을 느끼면서 대신 禪사상을 역설하고 있는 대목도 더러 나온다. 요컨대 그는 유가사회의 명분주의·형식주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문명사회로의 전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옥균이 생각하는 혁신사상의 밑바탕에는 명분주의 대신 평등주의, 그리고 형식주의 대신 無碍사상 같은 새 질서에로의 희망이 깔려 있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것은 여타의 개화파 인사들의 사상에까지 확대를 해 본다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 같다.≪조선불교통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서술은 바로 이와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옥균·서광범 등은 본래 귀족들의 자제로서 육식도 하는 속인들이었다. 그렇지만 불법의 이치를 듣고부터는 더욱 확신을 얻고 日本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힌 다음, 드디어는 조선사회의 혁신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뒷날 그들은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배운 불법의 이치를 바로 세간법에다가 응용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상의 연원을 살펴본다면 이는 실로 유 대치로부터 시발이 되는 것이다(李能和, 위의 책, 899쪽).

개화기 무기력과 침체 일로에 있던 한국 교계에, 개화당과 같은 일련의 혁신불교가 있었다는 것은 어쨌든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승려출신으로서 개화당에 들어 있던 사람-이를테면 개화승이라고도 할-이 간혹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름이 확실하게 드러난 경우는 바로 李東仁과 卓夢聖(挺埴) 두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의 인물과 생평에 대해서는 너무도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서 아직은 적절한 평가를 할 단계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일찍이 李瑄根이 이동인에 관한 연구를 시도해 본148)李瑄根,<奇傑했던 개화승 李東仁의 업적과 생애>(≪大韓佛敎≫200, 1967, 6), 이후 9회 연재. 이래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으나, 그 출신들이 워낙 오리무중이라 전반적 해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우선 이동인의 경우만을 대충 적어 보기로 한다면 그의 활동은 대개 아래와 같이 압축이 된다.149)李光麟,<開化僧 李東仁>(≪開化黨연구≫1973), 기타 참조.

◦ 1878년 12월, 일본의 淨土眞宗 부산 별원을 찾아가 포교사 奧村圓心을 만나 시세를 담론. ◦ 1879년 초여름, 서울로 가서 개화당의 지도자 유대치·김옥균 등을 만난 다음 그들의 주선으로 일본에 밀항. ◦ 1880년 일자 미상,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홍집을 만나 그와 함께 귀국, 閔泳翊에게 소개되어 그 집에 기거하며 국왕을 알현하고 국제정세를 상주. ◦ 1880년 9월, 외교사명을 띠고 재차 도일, 주일청국공사 何如璋을 만나 대미교섭에 관한 일을 상의하고 귀국. ◦ 1881년 3월, 통리기무아문의 참모관이 되어 무기구매 교섭차 출발 준비중 행방불명.

이 밖에 또 한 사람 卓夢聖도 비슷한 활동을 하다가 일본서 죽었는데,150)卓夢聖에 관해서는 근래 李光麟,<卓挺埴論>(≪開化黨硏究≫, 1994)에서 좀더 상세한 사실이 부각된 바 있으나 그도 결국은 개화운동가에 속하는 인물이다. 요컨대 이들은 2년 몇 달 동안 아주 눈부신 활동을 하다가 사라져 버린 일종의 풍운아들이었다. 그리고 이동인의 경우는 특히 오쿠무라(奧村)의 회고담에 “항상 국제간의 정세를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에 관해서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151)大谷派本願寺 朝鮮開敎監督府,≪朝鮮開敎五十年誌≫(東京, 1822), 137쪽.고 보이듯이, 불교와는 별로 관계없이 할동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심지어 “이동인의 이름은 개화당사에는 기록될지 모르지만 불교사에서는 제외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僧 동인의 인간적 한계가 있다”152)徐景洙,<開化思想家와 佛敎>(불교사학회 편,≪近代韓國佛敎史論≫, 1988), 305쪽.라는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동인·탁몽성 등은 어쨌든 승려출신으로서 환속한 사실은 없었다. 그리고 개화당의 지도자 유대치가 불전과 신앙은 이동인에게서 배웠다는 흔적도 남아 있는 점에서 본다면,153)古筠紀念會,≪金玉均傳≫. 이동인의 불교와의 관련성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화당의 핵심들이 위에 말한 대로 모두 불교를 좋아하는 거사들이었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본과 같이 ‘檀家’제도라는 것이 보편화돼 있지 않았던 유교사회에서 유대치·김옥균 등의 好佛은 일종의 居士林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개화운동이 비록 사원중심의 대세는 아니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재가불교로서의 움직임이었던 것만은 사실이겠다. 1880년대 개화당의 혁신운동은 결국 그 당시 거사림의 불교를 모체로 하고서 추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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