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2. 불교
  • 4) 일본불교의 침투와 입성 해금

4) 일본불교의 침투와 입성 해금

그러면 문호개방과 함께 밀려오게 되는 일본불교와 한국불교와의 관계는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대체로 ‘明治維新’ 이전의 일본불교는 우리의 그것과 매우 상이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알다시피 성리학적 국시 아래 가지가지의 핍박 속에 여지없이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의 불교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국교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리면서 국가권력과 아주 밀착이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그 나라의 호적까지 사원들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의 세속적 영향력을 누리고 있던 종교가 바로 근대 이전의 일본불교이다. 그리하여 학자에 따라서는 ‘완전히 속권 앞에 굴복,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일 이외에 아무런 기능도 있지 않았던 종교’라는 혹평까지 서슴치 않았다.154)家長三郞,<日本の近代化と佛敎>(≪講座近代佛敎≫II, 京都, 1963), 9쪽. 이것이 바로 德川시대의 일본불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가지는 일본불교가 명치유신시대의 이른바 ‘廢佛毁釋’의 법난사태를 겪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동시에 그들은 이러한 법난을 겪으면서 또 한 차례 변신, 더욱더 국수주의적인 종교가 된 사실 또한 알려져 있는 일이다.155)정광호,<明治佛敎의 Nationalism과 한국침략>(≪仁荷大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14, 1988), 참조.

어쨌든 그 때의 일본불교는 이와 같이 국수적인 경향을 농후하게 띠고 있던 집단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일본의 침략세력과 함께 이 땅으로 밀려오게 된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추세였다. 다시 말해서 어디까지나 침략세력의 앞잡이로서의 사명을 띠고 그들도 이 땅으로 밀려오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그 때 일본정권 당국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남긴 자료들을 가지고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문건들을 볼 때 특히 그러하다.

우리 本願寺는 ‘종교는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발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明治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성한 뒤로부터 점차 중국·조선에 향하여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또한 北海道의 개척을 바롯하여 중국·조선의 개교를 계획하였다. 明治 10년(1877) 내무경 大久保씨는 외무경 寺島씨와 함께 본원사 管長 嚴如上人에게 ‘조선개교에 관한 일’을 종용 의뢰하였다. 이에 본원사에서는 곧 제1차 개교에 공로가 있는…奧村圓心과 平野惠粹 두 사람을 발탁, 釜山에 별원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大谷派本願寺 朝鮮開敎監督府,≪朝鮮開敎五十年誌≫, 東京, 1922, 18∼19쪽).

요컨대 일본당국과 불교인들과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던가 함이 명쾌하게 드러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1898년대의 문건으로 조선개교사 奧村圓心이 東京 본산에 제출한 ‘光州개교에 관한 보고서’를 통하여 그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또 한 번 입증이 되는 것이다.

…일본과 한국은 唇齒와 같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東邦의 형세 날로 악화되고 한국은 바야흐로 말하기조차 어려운 상태에 있는데, 이 때를 당하여 우리도 王法爲本·忠君愛國의 敎를 가지고 피국민을 유도 계발함은 실로 우리 敎의 本旨이다…(加藤文敎,≪朝鮮開敎論≫, 東京, 1900, 20∼21쪽).

거듭 말하거니와 이 때의 일본불교는 대외정책의 앞잡이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정부에서도 ‘조선개교’에 관한 일을 안심하고 그들에게 맡겨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그들은 문호개방(1876) 이후 끊임없이 한국으로 침투하게 된다. 1877년 眞宗本願寺 부산별원의 건립에서 비롯된 1890년 말까지 일본불교의 조선에 대한 침투활동은 아래와 같이 자못 다양한 것이었다.156)정광호,<日帝의 宗敎정책과 植民地佛敎>(≪韓國史學>Ⅲ,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85∼89쪽 참조.

◦ 1877년 眞宗本願寺, 부산에 별원 건립. ◦ 1878년 대곡파 본원사, 부산에 별원 건립. ◦ 1878년 대곡파 본원사승 谷覺立·楓玄哲 등 朝鮮語학습을 위해 부산도착. ◦ 1879년 대곡파 본원사 유학생으로 金巴良忍 등 내한. ◦ 1880년 대곡파 본원사 元山별원 준공. ◦ 1881년 日蓮宗에서 부산 妙覺寺 건립. ◦ 1882년 일련종에서 원산 頂妙寺 건립. ◦ 1885년 西本願寺에서 별원(장소미상) 건립. ◦ 1890년 日蓮宗, 부산에 해외선교회 조직. ◦ 1890년 대곡파 본원사, 경성포교소 설립. ◦ 1893년 일련종, 원산포교소 설립. ◦ 1895년 일련종, 경성에 일한학교 설립. ◦ 1895년 일련종승 旭日苗, 인천에 妙覺寺 건립. ◦ 1895년 경성에 日蓮宗 교무소 설치. ◦ 1897년 대곡파 본원사, 광주 및 木浦포교소 설치. ◦ 1898년 정토종에서 별원(장소미상) 건립. ◦ 1898년 일련종승 加藤文敎, 경성에 護國寺 건립.

그렇다면 이와 같이 침투해 들어온 일제의 불교인들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활동을 하게 되는가. 우선 그들은 한국불교인들을 유인·포섭 내지는 개종까지 시키기 위해 각종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아주 일반적인 것은 ‘좌담·물질공여157)여기서 말하는 ‘물질공여’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으나, 앞의≪朝鮮開敎五十年誌≫143쪽에 개화승 李東仁이 일본에서 성냥이니 석유램프니 하는 것들을 가져다가 왕실과 개화파 인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이것과 흡사한 물건들이 아니었을까 한다.·교유·厚優’ 등의 방법을 쓰는 것이며, 좀더 특수한 방법으로는 또 아래와 같은 방법도 있었다.

◦ 각종 기술, 예컨대 제면·제지·양잠 등을 가르쳐 물질적인 편의를 준다. ◦ 僧俗을 불문하고 저명 인사들에게 일본시찰을 알선하여 호감을 갖게 한다.158)일본시찰에 관한 일은 일제 당국에서도 상당히 중시를 하고 있던 정책 중의 하나인데, 19세기 말 이후 1925년대까지 많은 숫자의 불교인들이 이 방침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시찰을 하고 왔다(정광호, 앞의 글, 1980 참조). ◦ 朝鮮人 교사를 채용하는 학교를 만들어 청년을 계발한다.

이 밖에 日蓮宗 같은 데서는 이러한 방법들 이외에 특히 ‘저락된 韓僧의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테마가 주요한 것으로 채택되는데,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때의 한국불교는 위에 말한 대로 수백년에 걸친 수모·천대를 받아 오는 동안 사회적인 위상이 너무도 떨어진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저락된 韓僧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또 어떤 일들을 해야 했던가.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들로서는 우선 ‘都城출입 금지’에 관한 악법부터 고쳐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억불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른바 ‘破天荒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격이었다는 표현까지 있는 것을 봐도159)高橋 亨, 앞의 책. 저간의 사정은 짐작됨이 있을 듯하다.

하여간 이 일을 위해 그들은 우리 정부와 여러 가지 교섭 끝에 결국 ‘입성금지를 완화하라’는 판결을 얻어 내기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개화기 한국불교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던가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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