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 해금’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로 본다면, 일본승려의 활동이 아니었더라도 해결하기가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하필 일본승려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교단에는 이로부터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게 된다.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일제 또는 일제의 불교인들에 대해 급속도로 호감을 느끼게 되는 풍조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尙順’이란 법명을 쓰던 崔就墟를 들 수 있는데, 1895년 4월, 입성금지가 해결됨과 동시에 그는 佐野前勵에게 아래와 같은 요지의 감사장을 보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이를 데 없이 천한 대접을 받아온 나머지, 不入城門의 차별 대우가 실로 수백년에 걸쳐 있었을 만큼 답답하고 억울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尊師께서 오시어 5백년래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시니, 그 감사하고 경하스러운 말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대의만 초역)(高橋亨,≪李朝佛敎≫, 1929).
위 감사장의 본문을 보면 이 사람이 일본승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는데, 그 당시 한국승려로서의 이러한 감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불교에는 수백년래 쌓여 온 寃屈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수백년 억불에 대한 반작용이랄 수도 있을 터인데, 아직은 일제의 야욕이 무엇이었던가를 간파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韓國痛史≫를 지은 朴殷植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광무 4년 가을, 淨土宗 廣安선사께서 남산 아래 깨끗한 정사를 짓고…우리 황제 폐하의 정복을 축수하시며…널리 자비를 베풀어 중생들을 제도코자 하심이 오늘날 이 법회의 취지가 아니겠습니까…(朴殷植,<淨土宗開敎誌序>,≪朴殷植全書≫중, 1975).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崔就墟의 감사장 같은 것은 실상 문제가 되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일본불교인들의 공덕을 상당한 부분 시인하고 있는 듯한 논리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때의 불교는 權相老도 일찍이 지적한 바 있다.
…국정의 억압과 俗尙의 빈척으로 말미암아 岩穴로써 一區 樂界를 삼고… 忘世 소요하던 조선 승려…(權相老,≪朝鮮佛敎略史≫, 1917, 250쪽).
그 당시 불교가 이와 같이 무기력하고 침체해 있던 것이 사실인데, 이러한 한국교단에도 日帝의 침투와 함께 자극과 변화는 나타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160)李能和, 앞의 책, 936쪽의 “於其宗旨 莫適所從” 운운. 불투명성은 있었으나, 어쨌든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는 의욕과 호기심만은 있었던 것이다.
…혹은 부화뇌동커나 혹은 (일제와 손잡고) 무슨 일인가를 꾸며보기도 하지마는, 요컨대는 모두가 남의 세력에만 의지코자 했던 것(李能和, 위의 책, 938쪽).
위와 같이 비판도 들을 만큼, 그 때의 교단은 주체성이 없었던 것이다. 권상로는 이 때의 상황을 가리켜 이렇게도 기술하였다.
승려계의 일부는 풍조를 흡인하고 일부는 습관을 고집하고, 혹은 세력을 希慕하여 외호도 의뢰코자 하며, 혹은 분개를 抱하여 자립으로 유지코자 하나, 그 대부분은 內地의 何宗과 연락하여 교세를 인상코자 하는 고로…(權相老, 앞의 책, 251쪽).
그리하여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찰들은 일제 내지는 그 불교인들과 손잡고 그들의 비호를 요청하는 사태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된다. 이른바 관리청원이란 형태로 구체화되는 피·아간의 접근이 바로 그것이었다. 관리청원이란 곧 일본측 모 종파와의 연합 또는 그 末寺 가입을 뜻하는 일본식 표현인데, 이것이 얼마나 비굴한 일이었던가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찰에 따라서는 일본측의 加末(말사가입) 교섭을 단호히 거부한 예도 있기는 하나,161)가령 通度寺에서는 1910년 5월경, 淨土宗 승려 最美光瑞와 일부 승려와의 사이에 ‘加末’ 교섭이 어느 정도 성립되어 있었으나, 이 때 그 절에는 몇 사람 비분강개한 승려가 있어 수원 龍珠寺의 姜大蓮과 합작, 그 日僧을 육박 추출한 쾌사가 있었다 한다(1920년대의 중앙포교사 金大隱 구술). 어쨌든 아래와 같이 상당히 많은 사찰들이 그것을 수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162)앞의≪朝鮮開敎五十年誌≫195쪽 및 前華嚴寺 주지 鄭曼宇 구술. 그런데 이 관리청원의 연대는 일제 통감부의 한국사원관리규칙(1906. 11. 17)이 발포된 뒤의 일일 것이니 대개 1907년 이후 ‘합병’ 직전까지의 사실일 듯하다.
◦ 통감부로부터 허가까지 얻은 사찰
김천 直指寺, 철원 四神庵, 박천 深源寺, 과천 戀主庵.
◦ 청원은 냈으나 허가를 얻지 못한 사찰
안주 大佛寺, 영변 普賢寺, 영변 法興寺, 영동 寧國寺, 고산 花岩寺, 합천 海印寺, 동소문외 華溪寺, 진주 大源寺, 용담 天皇寺, 회양 長安寺, 전주 鶴林寺, 동소문외 奉國寺, 동래 梵魚寺, 구례 華嚴寺.
이것으로 당시 교단의 일부 친일적 경향이 어떠했었던가를 대강 추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1910년대가 되면 드디어 한국사원 전체를 일제 불교와 연합시키려는 사건까지 있었을 만큼 그것은 한때 극도에 달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 음모는 朴漢永·韓龍雲 등의 반대운동에 부딪혀 결국 성공을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일제 불교인들의 이면 활동이 얼마나 집요한 것이었던가 하는 점만은 상상해 볼 수 있겠다. 동시에 ‘寺刹令’(1911년 6월 3일) 이전의 한국불교가 대체로 고식적 苟安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폄을 듣는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