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2. 불교
  • 6) 임제종운동-반조동종운동

6) 임제종운동-반조동종운동

일본의 침략세력이 밀려오기 시작한 뒤로부터 개화기의 불교가 얼마나 이리저리 방황을 하고 있었던가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대세는 역시 일본쪽―일본의 어떤 종파와 손잡고 그들의 세력을 빌려 고식적 苟安을 도모하려는 것이 그 때의 대세였다. 그러다가 1910년대가 되면 드디어 조선불교 전체를 일본의 어떤 종파와 합종하려는 음모까지 있었으니, 이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망발이 아닐 수 없다. 장본인은 바로 해인사 주지로 있던 李晦光인데,≪東師列傳≫에 이른바 “…그가 하룻밤만 자고 간 뒤면 마치 사향노루가 봄바람에 노닐던 것 같아서 풀밭 위에 저절로 향기가 남아 있었다”163)梵海 覺岸,<晦光講伯傳>(≪東師列傳≫ 복간 6, 1957).는 찬사가 있을 만큼, 한때는 사랑과 존경을 아울러 받던 그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이회광이 어찌하여 그러한 망동을 하게 됐던 것인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1907년 6월 25일 그가 불교연구회 회장과 明進學校 교장이 되면서부터 魔障은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불교연구회’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일본)淨土宗을 표방하면서 조직을 했던 단체―이를테면 우리 나라 최초의 친일불교단체이다.164)불교연구회의 조직과 성격에 대해서는 앞의≪朝鮮佛敎通史≫하 935쪽 이하를 비롯해서 여기저기 언급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분노를 느낀 나머지, 순수 전통에 입각한 통할기구를 갈망하는 여론도 또 한편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한다.165)朴敬勛,<近世佛敎의 연구>(불교사학회 편,≪近代韓國佛敎史論≫, 1988), 32쪽 참조. 그리하여 아직까지의 지도자였던 洪月初·李寶潭 등이 사직을 하고 대신 이회광이 이를 계승하게 되니, 이는 곧 위와 같은 여망에 부응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니까 이 때 이회광의 정신이 정상적인 것이었다면, 그야말로≪동사열전≫에서 말한 것과 같은 큰 법력을 발휘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연구회의 성격을 어디까지나 한국적 전통을 갖는 조직으로 바꾸어 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회장직’은 도리어 그의 부일적 야심만을 채우게 하는 계기가 됐을 뿐이니, 이는 실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이듬해(1908) 3월, 각도 사찰대표 52인이 모인 회의에서 연구회와는 별도로 다시 圓宗宗務院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각도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였으니 이는 그 때 일종의 중앙 통일기관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원종’이란 종칭이 그러했고,166)圓宗의 성격에 대해서는 앞의≪조선불교통사≫하, 935∼936쪽 기타에 여러 가지로 언급이 있으나, 요컨대 명백한 宗旨 설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 원장 이회광이 一進會 회장 李容九로부터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불교의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다”167)高橋亨, 앞의 책, 935쪽.는 권유를 받고 이용구가 추천하는 타케다(武田範之)를 고문으로 추대하였다든가 하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타케다는 그 때 일본 침략주의자들의 대표격인 사람으로 이를테면 일종의 ‘浪人’이라고도 할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에 대해서는 아직 더 연구를 해봐야 할 여지가 많은 사람이지마는, 어쨌든 이 때는 여러모로 한국불교의 일본화를 획책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회광이 이러한 타케다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야심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일이다.

때를 같이하여 일본 각 종파에서는 원종에 대해 여기저기서 손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원종은 결국 曺洞宗측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이 때의 연합조건과 조인과정이 또한 맹랑한 것이었다. 즉 조동종으로서는 그들이 원종의 설립인가를 얻어 주겠다는 것 이외에 아무런 책임도 진 것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원종으로서는 너무도 많은 조건들을 용납해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원종에서는 우리 사찰들을 그쪽 포교활동에 있는 대로 제공하도록 규정을 하는 동시에, 일본승려를 다시 고문으로 초빙토록 하는 등, 글자 그대로 불평등조약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약 상대방은 또 조동종의 管長도 아닌 일개 총무 弘津說三으로 돼 있었으니, 이회광의 야심은 과연 어떤 것이었기에 이렇게 만들어 놨던 것인가. 더구나 이 때는 이른바 ‘합병’조약이란 것이 체결된 지 꼭 38일째 되는 날(1910년 10월 6일)이었으니168)李能和, 앞의 책, 936∼938쪽.
高橋亨, 앞의 책, 920∼940쪽 참조.
그 때의 상황은 과연 무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 때 한국교단에는 이회광과 같은 賣宗的 승려들만이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단정치의 서슬 때문에 표면적 행동이 신중하였을 뿐 거기에는 항상 친일승려들의 망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던 일군의 애국승려들이 있었던 것이다. 朴漢永·韓龍雲 등을 주축으로 하는 전라·경상지방의 老德들이 바로 이러한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이회광 등의 음모를 간취한 그 날부터 일제히 원종을 규탄 봉기하기 시작한다. 운동의 주체는 뒤에 ‘南震應 北漢永’의 이름을 들을 만큼 당대 교단의 쌍벽을 이루고 있던 진진응·박한영의 양대 講主와, 무서운 지조인으로 이름이 높던 한용운 등이었다. 이들은 문자와 언설을 통하여 동지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처음 澄心寺에서 총회를 부쳤으나 내집자가 없어 유회되매 다시금 松廣寺에서 총회를 열고 임시종무원을 설치, 여기에 임시관장으로 한용운을 추대하였다. 이와 함께 임제종 포교당까지 세워 가며 宗旨를 선포하다가, 1912년에는 雙溪寺에서 제2총회를 열고, 종무원을 梵魚寺로 바꾸고, 또 그 규모도 좀 더 확대하여 대구·경성 등지에까지 포교당을 설치하는 등 활발하게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하여 ‘합병’ 직후의 한국교단은 한때 범어사 중심의 남방 임제종종무원과, 이회광 중심의 북방(서울 元興寺) 원종종무원과, 이렇게 양자가 서로 병립되는 사태가 벌어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병립교단에 대해 총독부 당국에서는 그저 사태만을 관망할 뿐이었고, 전기 원종종무원의 인가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은 우물쭈물 시간만을 끌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동안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의 반포와 함께 한국교단은 원종·임제종을 막론하고 그들의 강력한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1912년 6월 20일에는 드디어 양자의 문패가 한가지로 철거를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한국교단의 종칭도 결국 ‘禪敎兩宗’이란 강제적인 굴레 속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反曺洞宗운동-곧 臨濟宗운동은 한국불교사상의 일대 쾌거요, 나아가서는 간접적인 반일투쟁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鄭珖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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