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 1) 한국근대사와 천주교회

1) 한국근대사와 천주교회

근대 한국천주교회사의 전개는 박해정책하의 고난의 地下敎會에서 자유로운 地上敎會로의 전환과 근대적 발전을 추구하는 새 국면이 열리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가지 객관적 조건과 교회 자신이 안고 있던 제약조건으로 말미암아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밖에서 달려드는 식민주의 열강세력의 간여 때문에 교회의 근대적 발전이 굴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개항 후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민족사의 고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그 영향을 직접 받고 있었다. 한편 개항되었다 하나 한국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일관되게 가해지던 정부의 탄압정책의 영향은 끈질겼고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斥邪衛正的 사회기풍은 좀처럼 사그러지지 않았다. 따라서 천주교회에 가해지는 시련은 박해정책이 종식된 후에도 ‘敎案’이 滋生하는 모습으로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적 제약조건에 못지 않은 교회의 내적 모순은 각박한 한국근대사와 호흡을 같이하지 못하는 외국인 성직자들의 주도하에 존재해야 했던 천주교회의 구조상의 문제였다. 철저한 政敎分離 원칙과 성직자 주도체제 보수엄격 권위지도 및 個人救靈 치중의 신앙성향 등 이방인 司牧者들의 사목방침이 민중과 거리를 두게 하였고, 때로는 교회가 위기의 한말 사회와 유리되어 고고하고 괴리적인 존재로 비추어짐으로써 민족의 아픔과 겉도는 아쉬움 속에 천주신앙의 사회적 파급에 적지 않은 문제를 낳게 했다. 이러한 한국천주교와 민족사회의 부조화의 문제는, 한국천주교회 구성의 주체적 존재 즉 신자들은 한민족이지만 그 한민족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실체는 일본제국주의였고, 그 한국교회의 사목권자는 프랑스인을 중심한 외국성직자였다는 삼각관계에서 조성된 문제였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자 이 같은 괴리상황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제약조건으로 말미암아 근대의 한국천주교회는 한민족사회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교회로 급속하게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한국사회와 한국문화에 여러 가지로 뜻있게 기여했음은 주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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