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 2) 병인박해와 한국천주교회

2) 병인박해와 한국천주교회

한국근대사의 출발을 고종의 즉위와 興宣大院君의 집권부터로 규정할 때,169)韓國近代史의 起點에 관하여는 학문적 異論이 엇갈리고 있다. 즉 고종의 즉위·興宣大院君의 집정부터로 잡는 견해와 달리, 朝鮮開港으로부터, 甲午東學·甲午改革運動으로부터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한편 19세기 전반에 전개된 民亂부터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근대사는 교회사상 최대의 수난인 丙寅迫害로 그 막이 열리는 것이었다. 병인박해의 대참극을 맞기 이전의 한국천주교회는 근 20년간 큰 박해 없이 평온을 즐기고 있었다. 철종 때부터 고종의 즉위 초까지 20년 동안, 평온에 힘입어 교회는 사목체제를 강화하였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대하며 준비하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철종년간(1849∼1863)은 安東金氏의 노론 일당전제의 세도정치 아래서 교회는 그다지 큰 박해를 겪지 않았으며 그런대로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평온은 국왕 철종 가문의 신상문제와도 관계되나,170)철종의 조부인 恩彦君 裀(正祖의 庶弟)은 그 아들 常溪君의 모반죄로 정조대에 江華島로 유배되었었다. 서울에 잔류했던 恩彦君夫人과 그의 子婦인 常溪君夫人 두 사람이 당시 천주교의 여성회장이던 姜完淑의 인도로 周文謨神父로부터 모두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고 열심히 천주신앙을 봉행하다가 1801년의 辛酉迫害 때 이 사실이 드러나 두 분 모두 刑死된 일이 있었다. 철종은 은언군의 다른 아들로 강화로 같이 유배된 全溪君의 아들이다. 당시 집권세력인 안동김씨가 온건 박해세력이었던 점도 작용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평온을 틈타 조선천주교회는 이미 憲宗 때에 입국한 2명으로 된 성직조직을 보강하기 위해, 철종 때에 들어서면서 해외로부터 전교신부들을 비밀리에 계속 영입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귀국의 방도를 찾고 있던 邦人聖職者인 崔良業신부가 철종 때에 해로를 이용하여 마침내 고국에 돌아와 조선교회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171)崔良業神父는 일찍이 16세 때 金大建·崔方濟와 같이 Maubant신부에 의해 少年神學生으로 선발되어 1836년 멀리 中國 澳門(Macao)으로 유학하였다. 1842년에 귀국 길에 올라 중국 본토와 만주를 오가며 고국으로의 귀환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1849년 上海에서 敍品을 받고 김대건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신부가 되었다. 그 해 해로로 비밀리에 귀국하였고 이후 그가 1861년 6월에 지방 전교여행 도중 聞慶에서 善終할 때까지 12년간 전국을 누비며 전교 사목활동을 폈었다. 그 밖에 11명의 프랑스신부들도 해로를 이용하여 속속 한반도로 잠입하여 사목활동을 펴게 되었다. 1854년(철종 5)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한국명 張敬一)主敎가 朝鮮敎區聖職者會議를 소집하여 조선교회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으며, 1856년 배론(舟論)神學校(현 堤川市 鳳陽邑 九鶴里)를 개교하여 장차 한국교회을 이끌고 나갈 방인성직자 교육을 시작하는 등 새로운 채비를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 20년간의 평온한 상황은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의 집정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하였다. 왕권 재확립을 위하여 강력한 전제정치를 펴게 된 흥선대원군이 마침내 역사상 최대의 박해로 일컬어지는 전후 6년간에 걸친 병인대박해를 강행하여 천주교회에 일대 참극이 벚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172)丙寅迫害와 그 때의 순교자에 관하여는 다음 두 연구가 참고된다.
柳洪烈,≪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硏究≫(乙酉文化社, 1962).
崔奭祐,≪丙寅迫害資料硏究≫(韓國敎會史硏究所, 1980).

집권 초기에 천주교문제에 유화적 대책을 취하던 흥선대원군은, 1860년 沿海州를 영유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제국이 자주 豆滿江越境의 소동을 벌여 국제적 긴장을 야기하여 북변문제가 긴박해지자, 南鐘三의 ‘以夷制夷의 防俄策’ 건의에 흥미를 보이며 한때 천주교 당국과의 연합을 꾀하는 책략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계의 갈등 속에서 천주교와의 접근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위기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자 돌연 천주교박해령을 선포하였으며, 이후 6년간에 걸쳐 역사 이래 최대규모의 종교박해를 강력히 추진하여 천주교회가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1866년 초부터 6년간을 두고 계속된 병인박해는 8,000명의 순교자를 전국 각지에서 양산한 대참극이었다. 이처럼 전국적 규모로 수많은 교도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대박해가 벌어지게 된 데에는 제너럴 셔만(General Sherman)호사건, 프랑스에 의한 丙寅洋擾, Oppert 등에 의한 南延君墓盜掘事件이나 미함대에 의한 辛未洋擾 등 서구 식민주의세력에 의한 조선침공 소동이 계속 벌어진 사실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국가적 위기를 고조시켰고, 사회적으로는 척사위정세력을 자극하였으며 집권자 흥선대원군을 분격케 하였는데, 이들 사건이 외세에 부동하는 내부의 通外勢力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고 호도하였다. 이 때 누구보다 먼저 ‘通外分子’로 지목된 것이 천주교도들이었다. 집권세력은 내부에서 비등하는 침략적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이용하여 천주교도를 ‘招寇之徒’로 몰아 박해를 가하였다. 조선의 쇄국척양정책과 서교탄압은 이러한 여건과 배경에서 매우 철저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先斬後啓令’이 발동된 가운데 다년간 계속된 천주교박해로 말미암아 조선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된 한편 지리멸렬의 빈사상태에 몰리게 되었다. 프랑스 성직자 12명 중 9명이 순교한 것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8,000명의 순교자가 생겨났다(당시 조선천주교회 신자수는 23,000여 명 추산). 살아 남은 3명의 프랑스 성직자는 일단 모두 중국으로 피신하자 조선교회는 ‘성직자 없는 교회’가 되었고, 교회조직은 철저히 파괴되는 타격을 입었다.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벌어지는 박해의 현장을 두고 일단 중국으로 탈출한 조선교구 소속 성직자들은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Ridel)주교를 중심으로 박해의 凍土인 한반도에 인접한 만주 땅 챠쿠(岔溝)173)조선왕국의 국경도시이던 義州에서 300여 리 상거로 遼東半島 남부 莊河변의 한 교인촌. 이 곳에 朝鮮敎區長 Ridel主敎와 Colae's, Blanc, Richard, Martineau, Coste, Deguette, Robert, Mutel 등 조선교구 소속 성직자들이 차차 모여들어 조선왕국으로의 입국을 대기하고 있었다.에 朝鮮敎區臨時海外本部를 설치하고 새로이 조선교회 재흥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조선교구로 파견되는 프랑스 성직자를 받아들여 성직 진용을 다시 보강하였으며, 조선교구에서 펼쳐질 장차의 활동에 대비하여 조선어학습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학습의 편의를 위하여≪韓佛字典≫과≪韓語文典≫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1876년에는 드게트(Deguette)신부를 국내로 잠입시켜 교회 재건에 적극 나서게 된다.174)Deguette신부는 1876년 Blanc신부와 같이 조선왕국으로 비밀리 입국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江華島條約으로 개항한 후 조선에 부임해 온 최초의 두 프랑스 성직자였다. Deguette신부는 1879년 公州에서 체포되었고 滿洲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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