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 3) 그리스도 전교자유의 구현

3) 그리스도 전교자유의 구현

조선천주교회는 그 창설 초기부터 정부의 박해정책으로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였다. 많은 순교자들이 줄을 잇는 시련의 역사였다. 교회활동은 이른바 ‘지하교회’로의 음성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박해를 겪는 가운데 교회측에서 신앙자유를 위해 自救策을 강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 할 수 있다. 자구적인 신앙자유의 추구운동은 자유주의운동과 더불어 생겨나게 된 서구사회의 근대적인 신앙자유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박해로부터 신앙생활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한 몸부림이었기에 역사적으로 같은 신앙자유운동의 선상에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박해받는 조선천주교회의 신앙생활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안’과 ‘밖’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안에서는 고난을 겪는 조선천주교인들이 자구적 차원에서 ‘洋舶請來運動’과 ‘對敎皇請願運動’을 전개하였고, 밖에서는 조선으로의 진출을 원하던 프랑스 식민주의세력이 군사적 개교압력과 외교적 교섭의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상과 같은 방법 가운데 시대적으로 가장 선행된 것은 박해시대 조선교인들에 의한 ‘양박청래운동’이었다. 즉 “만약 大舶을 맞이할 수 있다면 國禁이 완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吾道는 크게 廣揚될 것”175)≪邪學懲義≫권 1, 傳敎奏啓, 全羅監司金達淳密啓.이라는 천주교인들의 안이한 생각에서 서양의 힘을 빌어 그들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한 공작이었다. 이 공작은 평화적인 방법과 더불어 군사적 방법으로도 추진되었다. 조선교회 초창기, 즉 전교신부가 아직 입국하기 전 시기에 벌어졌던 천주교도 柳恒儉·尹有一 등을 중심한 ‘제1차 洋舶請來事件’176)1790년 9월에 천주교도 柳恒儉·李家煥·柳重泰 등이 李承薰·洪樂敏 등과 밀의 끝에 ‘請來大舶’하기 위해 밀사 尹有一을 北京主敎에게 파견한 사건(≪邪學懲義≫권 2, 移還送秩 및 柳恒儉等推案 참조).이나 1795년 조선왕국에 전교차 파송되어 비밀리에 입국한 周文謨神父와 柳觀儉·李承薰 등을 중심한 ‘제2차 洋舶請來事件’177)周文謨神父는 柳恒儉·觀儉형제, 黃沁, 李存昌 등과 밀의하여 1795년 이후 王千禧·金有山 등을 계속 北京主敎에게 파견하여 ‘洋舶出來’·‘一場判決’을 도모하였다(≪邪學懲義≫권 1, 全羅監司金達淳密啓;≪闢衛編≫하, 권 5, 討邪奏文 등 참조).은 서양 군주가 큰 배를 보내어 국서로 천주교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교섭해 달라는 생각을 담은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1801년 辛酉迫害의 회오리 속에 黃嗣永 등이 帛書를 북경주교에 송부하여 조선교회 재건을 위해 밖에서 영향을 발휘해 주도록 제시한 다섯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인 ‘大舶請來武力開敎’의 공작은 외세의 무력시위에 의한 종교자유 획득을 목적하여 군사적 방법을 권유한 것이어서 정치성이 문제되는 자구책이었다.178)山口正之,≪黃嗣永帛書硏究≫(全國書房, 日本;大阪, 1946).
石井壽夫,<黃嗣永帛書に就いて―朝鮮に於ける洋舶請來の思想―>(≪日本歷史學硏究≫10-1·2·3, 東京, 1940).
여진천신부 엮음,≪황사영백서논문선집≫(도서출판 기쁜소식, 1994).
趙 珖,<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史叢≫21·22, 1977, 高大 史學會).
朱明俊,<天主敎信徒들의 西洋船舶請願>(≪敎會史硏究≫3, 韓國敎會史硏究所, 1981)
帛書의 洋舶請來를 제의하는 부분은 원문 110∼111행에 걸쳐 있다.
이보다 60여 년 후 흥선대원군 집정 초에 洪鳳周·南鐘三 등이 건의하였던 ‘以夷制夷의 防俄策’―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연해주를 차지한 후 자주 일어난 러시아인의 豆滿江越境事件으로 긴박해진 변방대책을 건의한 것으로―은 프랑스함대를 끌어들여 러시아남침세력을 방어하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들의 건의도 프랑스제국이라는 외세의 영향하에 천주교회활동의 자유를 얻고자 획책한 것이기에 성격상 황사영의 양박청래 구상과 착상을 같이하는 것이었다.179)<丙寅邪獄罪人鐘三鳳周等鞫案>.

이상 여러 모습으로 추진되었던 ‘洋舶請來事’는 强穩의 차이는 있으나, 그리스도 서양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용하여 천주신앙의 자유를 얻어 보고자 한 박해받는 교회의 자구적 종교자유 획득의 공작이었다. 그것은, 일면 천주교도들의 국제정치적 현명을 보여주는 일이기는 하였으나, 탐욕스러운 洋舶勢力 즉 서양 식민주의국가의 야심을 자극하여 침략을 유발할 위험성이 내포된 대책이었다. 그러기에 이러한 공작들은 모두 ‘招寇’·‘通外’의 ‘賣國之計’로 단정되어 이 공작을 추진한 교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박해가 더욱 격화되었을 뿐이었다.

조선천주교도들의 자구적 종교자유의 획득 공작과는 별도로 조선왕국 밖의 식민주의 열강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서구식 신앙자유의 개념에 입각하여 조선에서의 천주신앙자유를 실현해 보려는 공작도 거듭하였다. 물론 그러한 서구 식민주의국가의 노력이 조선에서의 천주신앙자유의 구현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국의 식민세력을 조선왕국에 부식하려는 식민주의적 침략 의도를 담은 것이기도 했다.

1839년 己亥迫害 때 巴里外邦傳敎會(La Société des Missions - Etrangéres de Paris, MEP) 소속 세 성직자(Imbert주교, Maubant·Chastan신부)를 처형한 데 대한 문책을 이유로,180)≪憲宗實錄≫권 13, 12년 7월 병술. 1846년 프랑스동양함대(사령관 Cecille제독)가 충청해안에 출동하여 국서를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이 통교교섭은 조선정부의 일관된 통교 거부로 말미암아 그냥 돌아갔다.181)李元淳,<韓佛條約과 宗敎自由의 문제>(≪朝鮮時代史論集≫, 느티나무, 1993), 197∼198쪽. 또 1866년에는 당시의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se)의 결정에 의해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1개월 이상 점거하고 한강을 봉쇄하며 흥선대원군의 굴복을 강요하는 사건인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 때에도 병인박해 때 희생된 9명의 프랑스 성직자에 대해 자국인 살해를 문책한다는 것을 구실 삼아 무력침략을 감행하였으나 본의는 국교의 강요에 있었다.182)李元淳, 위의 글, 198∼201쪽.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교인들의 자구 노력은 그 외세의존적 성격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무력으로 굴종을 강요하는 서구 식민주의국가의 일방적 요구도 조선측의 거부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함으로써 조선천주교회의 신앙자유의 획득에 어떤 도움이나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조선왕국에서의 그리스도신앙의 자유는, 조선왕국이 개항함으로써 세계사의 조류에 합류하고 이에 따라 서구세력이 평화적으로 상륙하게 되는 시대상황의 전환을 배경으로 외교적 절충이 진전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될 수 있게 된다. 군사적 위협으로써가 아니라 평화적 외교절충으로써 외래선교사의 ‘傳敎의 자유’ 획득이 선행되고, 뒤이어 자생하는 ‘敎案’의 해결을 위한 敎民條約에 의해 조선천주교인이 ‘信敎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기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가 구현되었다. 봉건적 구속에서 근대적 자유로의 변화는 역사적 필연성을 띤 추세였기에 ‘종교의 자유’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근대적 과제였다.183)李元淳, 위의 글, 189∼216쪽. 이 역사적 과제는 쇄국조선이 대외개방의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고 종래 쇄국 일변도로 대응해 오던 서구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수호조약이 체결되는 변화과정을 통해 금압에서 묵인, 묵인에서 교회존재의 인정, 다시 전교활동의 자유 보장, 끝으로 조선교인의 신교자유의 허용으로 4단계 과정을 거치며 종교자유가 구현된다.

쇄국조선이 개항하게 되는 것은 1876년 江華島條約에 의해서였다. 한·일간에 맺어진 이 조약에는 그리스도신앙에 관한 아무런 약정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에 대해 개항했다는 사실은 병인박해 후 만주 땅 챠쿠에 조선교구임시본부를 두고 조선 현지로 다시 진출할 날을 기다리던 프랑스 성직자들에게는 조선 잠입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었다. 조선개항의 해에 블랑신부와 드게트신부가 그들의 사목 임지인 조선왕국으로 숨어 들어왔고, 그 다음해에는 리델주교가 다른 2명의 신부와 잠입활동하게 되니 조선천주교회는 11년 만에 다시 성직자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리델주교는 입국 후 얼마 가지 않아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개항정책을 취하던 민씨정권은 일본의 석방 권유와 청국의 ‘査明解放’의 照會를 받아들여 중국으로 추방하는 조치만을 취했다.184)≪承政院日記≫, 고종 15년 5월 4일.
≪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권 1, 제27 附件 1,<朝鮮國王咨覆釋放敎士文>.
한편 1879년에는 뮈텔(Mutel)신부와 레비(Laivitte)신부가 白川 땅에서 체포되었으나 조선정부는 지방관의 무지 때문에 일어난 일로 처리하여 국외로 추방하지도 않고 그대로 석방시켰다.185)≪서울敎區年報≫1, 明洞天主敎會200年史資料集(明洞天主敎會, 1984), 19∼22쪽(이 資料集은 巴里外邦傳敎會의 각 布敎地別報告書인≪Compte Rendu≫를 韓國敎會史硏究所에서 번역한 것이다). 이 두 사건은 조선정부의 대천주교정책이 금압에서 묵인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호함으로써 서구 국가에도 문호를 개방하자 종래 박해와 형살의 대상이던 이른바 ‘洋夷’들이 조약에 의해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한반도에 상륙할 수 있게 되었다. 조미조약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조항은 없었다. 그러나 조약체결 후에 전국 각지에서 斥和碑를 철거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전통적인 척화·척사의 박해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하였다.186)日本辨理公使 花房義質의 요청에 의해 辛未洋擾 때 각지에 竪立하였던 斥和碑의 拔去를 하교하였고 議政府가 이를 포고하여 전국에서 拔去케 했다(≪承政院日記≫, 고종 19년 8월 5일). 1883년 독일과 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개항장에서 열리는 서양인들만의 종교행사를 보장하는 약정을 맺었다. 즉 외국인들이 특정한 장소에서 종교행사를 인정함으로써 외국인들에 대한 국내에서의 신앙생활을 공적으로 보장해 준 최초의 조치였다.187)<朝德修好通商條約>第四款二.

조약상으로 조선 전국에 서양인에 의한 전교활동의 자유가 약정된 것은 1886년에 체결된<朝佛修好通商條約>에서의 일이었다.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수호조약이 교섭될 때 양국은 그리스도신앙의 문제를 가지고 1개월 이상이나 날카롭게 대립했으나 결국 護照를 가진 프랑스인의 내지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고(4조 6항), ‘敎誨’활동은 서로 보호한다는(9조 2항) 것을 약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조항으로 조선에서의 전교활동이 명쾌히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결국 외국인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이 실질적으로 확정된 것이었기에, 이후 천주교 성직자는 물론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 각지에서 활발한 전교활동을 펴게 되었다.188)1886년 6월 4일 조인된<朝佛修好通商條約>의 내용 중 傳敎自由와 관련된 조문은 4款 6項과 9款 2項 등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