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 4) 교안과 신교자유의 문제

4) 교안과 신교자유의 문제

한불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외국인에 대한 그리스도신앙 전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었으나 내국인까지 ‘信敎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약정 내용도 명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약정 사실을 국민 앞에 공시적으로 선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외국인 전교사의 지방진출과 전교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방관이나 지방민인들과 외국인 전교사·교인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그것이 외교문제로 확대되는 일도 벌어지게 되는 가운데 ‘敎案’은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교안’이란 종교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안을 뜻하는 용어로서, 그런 사안 가운데 특히 외교문제로 확대되거나 법률적 분쟁으로까지 발전한 문제를 지칭하는 관용적인 역사용어이다.189)‘敎案’이란 역사적 용어는 중국에서 그리스도교와 관계되는 박해사건, 외교사안 등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616년 禮部侍郞署南京尙書이던 沈搉 의 공작으로 벌어진 南京에서의 천주교박해사건을 ‘南京敎案’이라고 기록한 데서 비롯됐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말의 黃玹이 광무 7년에 黃海道 일대에서 벌어진 교인과 민인 사이의 충돌소요를 ‘海西敎案’이라고 표현한 후 역사적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梅泉野錄≫권 3, 광무 7년 6월). 우리 나라에서 교안은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에 의해 외국인의 전교활동이 허용됨에 따라 전교신부들이 정부가 발행하는 護照를 지니고 지방 각지에서 활동하면서부터 滋生하게 된다. 종교탄압정책이 종식된 후 교회와 당국, 지방 전교신부와 지방관료, 그리고 교인과 비교인 사이에 벌어진 각종 교안이 그것이다.

한불조약의 전교활동약정으로 한 세기에 걸친 천주교 박해, 외국인 배격의 사회적 분위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방관료나 지방사회에서의 천주교·서양인에 대한 감정은 여전하였다. 한편 천주교회측과 천주교인들은 그 조약문에 외교적으로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는 서양인의 전교활동 보장을 한국인의 천주교신앙에 대한 신교의 자유까지 허용한 내용으로 보고 점차 신앙활동을 공공연히 드러내놓게 됨으로써 비교인과의 사이에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잦은 알륵을 빚게 되었다. 폭행사태로 진전되고 심지어는 재판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사태가 심각하게 확대된 것은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는 외국인 성직자들이 사건에 개입하거나, 지방관료가 이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확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1886∼1906년에 발생한 교안을 당시의 각종 기록을 통해 발생 원인에 따라 유형별로 보면 대략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프랑스 성직자들이 내지에서 전도활동을 펴면서 야기된 성직자 축출, 성직자에 대한 폭행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교안이다.

둘째, 교인·비교인 사이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감정이 악화되어 서로 다투는 사건이 교안으로 확대된 경우다. 이런 충돌은 종교적 이유에서 생기는 예도 있었으나, 재산·이권 다툼에서 벌어진 싸움이나 소송이 종교적 성격으로 윤색된 경우가 많다.

셋째, 전통적 박해의 사회적 기풍에 젖은 지방관이 중앙정부의 전교자유 방침을 외면하거나 몰지각하게 관권을 남용하여 교도들에 핍박을 가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교안이다.

넷째, 동학세력이나 商務社·皇國協會·一進會 등 보수성향의 사회조직이 천주교측에 대해 조직적인 폭력을 감행함으로써 빚어진 교안이다.

다섯째,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洋大人’인 서양성직자의 그늘에서 엉뚱한 이득을 취하려는 藉托敎人이나, 관에 쫓기다 신앙과 관계없이 입교한 동학도 등 似以非敎人들 때문에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교안도 있다.

한말에 벌어진 200여 건에 달하는 교안190)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敎案’(Anti Christian Movement)문제를 다룬 연구는 李元淳의<朝鮮末期社會의 敎案硏究>이다(이 글은 1973년≪歷史敎育≫5,<朝鮮末期社會의 對西敎問題硏究―敎案을 中心으로 한―>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나, 그 후 1986년≪韓國天主敎會史硏究≫에 앞의 제목으로 재수록 공간하였다. 167∼240쪽). 가운데 교당건축 문제로, 또는 서양성직자의 內地 침투로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교안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편 심각한 사회문제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교안으로는 1899년의 江鏡(景)浦敎案,191)이 敎案은 당시≪漢城新聞≫·≪皇城新聞≫·≪帝國新聞≫·≪獨立新聞≫등에 연일 보도되었다(≪舊韓國外交文書(法案)≫1053호에는 江鏡(景)浦의 張敎士事件으로 나와 있다). 1903년의 海西敎案,192)宋順姬,<海西敎案硏究-1900∼1910년까지의 黃海道地方起鬧事件->(1978) 참조. 1901년의 濟州島辛丑敎案193)濟州島辛丑敎案에 대하여는 이를 敎難으로 규정하는 ① 교회사적 연구와, 제주도민의 민란으로 그 성격을 파악하는 ② 민중사적 연구가 엇갈려 있다. 민란으로 이해하는 연구는 이 사건을 ‘李在守의 亂’ 또는 ‘1901년의 濟州民亂’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견해의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① 柳洪烈,<濟州島에 있어서의 天主敎迫害>(≪李丙燾華甲論文集≫, 一潮閣, 1956).
  金玉姬,≪濟州島 辛丑年 敎難史≫, 천주교 제주교구, 1960).
② 金洋植,<1901년의 濟州民亂의 再檢討>(≪濟州島硏究≫6, 제주도연구회, 1989).
등이 있다. 해서교안은 황해도 서부 일대에 확대되었던 교안이며, 제주도신축교안은 제주도가 지닌 역사적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제주읍성 攻守戰이 벌어져 일시에 800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으며 프랑스함대의 출동으로까지 확대된 점에서 가장 대규모의 희생을 낸 교안이었다.

각지에서 자생하는 교안은, 교인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지방의 전교사와 비교인의 권익을 감싸려는 지방관의 타협으로 자체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때로는 문제가 보다 상부인 주교와 조선정부의 內部와의 교섭으로까지 비화되는 심각한 경우도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프랑스공사관과 우리 정부의 외교기관인 外部간의 교섭으로 겨우 진정되기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근 20년을 두고 계속 제기되는 대소 교안의 뒷처리 대책은 교회 당사자나 정부당국자 모두에게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교회와 정부는 교안문제 발생의 근본대책과 상호간의 책임 한계를 확정지을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깨닫게 되었고 양자간의 협상이 진행된 끝에 1899년 3월 마침내<敎民條約>194)이 조약문(아래의 전문 9개조)은 李元淳이 1965년에 명동성당 지하서고에 보관되어 있던 Mutel주교의 문서류를 韓國敎會史硏究所의 의뢰로 조사할 때 內部 地方局長 鄭駿時와 閔德孝(Mutel主敎의 한국명)가 조인한 원문을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알려졌다(Mutel文書 M-1899-9 敎民條約, 현재 韓國敎會史硏究所 소장). Mutel문서에 관해서는 李元淳,<未公開史料 Mutel文書>(≪韓國史硏究≫3, 1969) 참조.
제1조 敎民의 보호 및 징계사건은 地方局長이 主敎와 더불어 타협 상의하여 立約할 事
제2조 傳敎師는 行政에 간여하지 아니하며 行政官은 傳敎에 간섭하지 아니할 事
제3조 敎民 가운데 만약 범법자가 있으면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담당관리가 체포할 때 그 지방 神父가 비호 은익치 못하며, 담당관청의 아전들이 足債를 요구하여 만약 討索하는 폐가 있으면 그 아전을 단호히 엄징할 것이며 그 돈은 모두 推還할 事
제4조 犯法敎民이 지방관아에서 재판을 받을 떄 그 지방 神父가 직접 참여하여 간여치 못하며, 그 지방관아는 愛憎으로 소송을 판결치 못할 事
제5조 각 지방의 敎民들이 神父의 지시 가르침을 藉托하여 平民을 捉去하지 못할 事
제6조 敎民 가운데 만약 억울한 일이 있는데도 혹 지방관리와 관계되어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地方局에 來訴할 것이며, 地方局長은 그 지방에 사실을 조사토록 하여 공정히 판결할 事
제7조 혹 敎中에 관계된 대사건이 있어 지방관이 능히 擅便치 못하면 地方局長에게 조목조목 보고할 것이며 그 지방 神父 또한 거듭 主敎에게 보고한 즉, 주교와 지방국장이 서로 사실을 밝혀 상의하여 일을 결정할 것이요, 여기서도 擅便치 못하면 地方局長은 大臣에게 아뢰고 主敎는 公使에게 보고하여 공정함에 이르도록 할 事
제8조 敎民이 만약 의외의 橫厄을 당하여 平民이 연고 없이 원망을 받은 즉, 그 지방관은 특별히 비호하여 越權함을 나타내지 아니할 事
제9조 어떠한 허락 사항을 막론하고 약정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관계된 것이라도 약정이 이루어진 날을 논하지 말고 시행할 事
의 체결을 보았다.

조선천주교회와 정부책임자 사이에 조인된<敎民條約>은 근대민족국가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 로마교황과 세속적 통치권을 대표하는 국가원수 사이에 종교와 정치활동의 책임 한계를 약정한 콩코루다조약(Concordatum)195)Concordatum의 번역용어는<政敎條約>이며 그것은 교회와 국가가 교회권과 국가권의 최고권자들이 맺은 조약이었다. 역사상 최초의 政敎條約은 聖職敍任權의 분쟁을 둘러싸고 교황 CallistusⅡ와 독일 Heinrich Ⅴ 사이에 체결된 보름스조약이나, 근대에 들어 국권이 강화되면서 교권과 자주 분쟁을 야기하게 되자 敎皇廳과 佛·獨·伊 등 근대국가 사이에 상호 이해가 공통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적 장치인 콩코루다조약이 유럽 근대국가와 교황청 사이에 속속 체결되어 정교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게 된다.과는 그 의의가 다르지만,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교회와 정부의 기능 한계를 확정지은 점에서는 궤를 같이하는 준콩코루다툼적인 약정이었다.<교민조약>이 체결된 후 교안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조선천주교회의 사목활동을 영도하던 프랑스 성직자들의 종교활동을 근대적 규정으로 확정짓고자 프랑스공사관이 나서서 조선정부와 사이에 ‘敎民犯法團束條例인 宣敎條約’의 체결 교섭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 선교조약의 조인 여부는 단언할 수 없으나 조선정부의 외부대신과 프랑스공사 사이에 조인되어야 했던 것이므로 교민조약의 국제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196)이 조약안은 大韓帝國 外部大臣 李夏榮과 프랑스代理公使 Fontaney(漢字이름 馮道來) 사이에 妥商된 것으로,≪帝國新聞≫기사에 의하면<敎民犯法團束擬稿>라는 이름으로 전문 8조로 되어 있었다(李元淳, 앞의 글, 1986, 232∼235쪽 참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