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 5)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새로운 고민

5)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새로운 고민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에 의해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전교활동의 자유가 외교적으로 약정되었다. 그 후 잇따라 敎案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 천주교 당사자와 內部 당국자가<교민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1904년 선교조약이 타결되는 것을 계기로 한국교인들에 대해서도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름으로써,197)宣敎條約의 조문에 한국인의 신교자유가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신교를 묵인적으로 전제하고 선교사들의 활동에 관해 규정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조선천주교회는 그 창설 이후 1세기 남짓에 걸쳤던 박해의 시기를 벗어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즉 박해받는 ‘잠행적인 지하교회’로서의 역사가 법으로 보호받는 ‘자유로운 지상교회’로 새롭게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근대교회로의 발전은 먼저 사목권의 강화로 나타났다. 丙子修好條約으로 조선왕국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된 후인 1877년에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 리델(Ridel)주교가 드세(Ducet)·로베르(Robert) 등 두 신부를 대동하고 만주의 조선교구 해외임시본부로부터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3개월 후 당국에 체포되어 만주로 추방되자 프랑스로 돌아감으로써 조선교구의 사목권자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가 1884년 사망한 후 조선교구의 교구장이 된 성직자는 리델주교 추방 후 副主敎 직책을 맡아 오던 블랑(Blanc)주교였다.198)Blanc, Jean Marie Gustav(1844∼1890, 한국명 白圭三, 朝鮮敎區 제7대 敎區長 1882∼1890 재임).

블랑주교는 조만간 실현될 종교의 자유시대를 대비하여 原州 부흥골(현 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坪里) 산협에 조선교회의 邦人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는 한불조약체결 후에 서울 龍山으로 이설하여 ‘예수성심신학교’로 개편된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전신이다. 블랑주교는 지상교회로 전교의 자유를 보장받은 새 교회의 사목지침으로 ‘敎會指導書’을 제정 공포하는 한편, 개방시대의 전교활동에 필요한 교리서를 찍어 낼 인쇄시설로 그간 일본 長崎에 두었던 조선교구의 聖書出版所를 서울에 이설하였다. 또한 조선전도의 협력자로 프랑스 샬트르聖바오로女子修道會를 조선으로 유치하는 등 근대교회로 발전할 체제정비에 힘썼다.199)Blanc文書, 韓國敎會史硏究所 소장의 佛文文書(복사간행). 1890년에 사망한 블랑주교의 뒤를 이은 교구장은 뮈텔(Mutel, 閔德孝)주교였다.200)Mutel, Gustav Charles Marie(1854∼1933, 한국명 閔德孝, 朝鮮敎區 제8대 敎區長, 1890. 8∼1933. 1. 재임).

뮈텔주교는 원래 1880년에 조선교구 소속의 전교신부로 조선에 입국하여 5년간 전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885년 파리본부로 소환되어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의 학감직을 맡던 중 조선교구 8대 교구장이 되어 재차 조선왕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1891년 2월 그는 조선으로 부임해 왔다. 조선전교의 경험자인 그는 이제 박해에서 벗어난 조선교회의 발전을 새로운 각도에서 추진할 필요가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3년에 서울에서 善終할 때까지 43년간을 조선천주교회 최고책임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왕국이 일제침략의 마수 때문에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해 한반도가 강점된 후에도 23년 동안, 그는 主敎座가 있던 명동에서 지내면서 한민족의 고난과 일제의 만행을 지켜 보왔다.

그는 지상교회로서의 새 역사를 다지게 된 조선천주교회의 근대적 발전을 부단히 추진하였다. 그가 조선에 부임하기 전인 1888년에는 교인 15,416명에 성직자가 16명이고 전국에 성당이 네 곳뿐이던 교회를,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1910년에 이르러는 교인 73,517명, 성직자 63명, 수녀 59명에 전국 69개의 성당을 가지는 교회로 교세를 신장시켰다. 이처럼 조선교회는 藥峴·明洞 등에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건물을 마련하고 파리본부로부터 전교성직자를 증원받아 성직 진용을 강화하였고, 仁川·大邱·旺林·水原·咸悅·橫城·豊水院·釜山·全州·江景·倭館·元山·濟州 등과 그 밖의 전국 각지에 교회를 설립하여 교세를 확장하기에 힘썼다.

또한 조선교인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각지에 교회 부설의 사립학교를 속속 설립하였다. 한편 조선에서 교사교육을 담당시키는 동시에 조선교회 전도의 동반자로 독일의 베네딕트(聖芬道)수도회를 유치하였으며, 교인을 중심한 조선인들의 근대적 계몽을 위하여≪京鄕新聞≫과≪京鄕雜誌≫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가 낳은 순교자들의 순교사적 조사에도 힘을 기울여 뒷날 韓國聖人들이 생겨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작성하는 등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201)Mgr. Larribeau, Un grand Evéque missinnaire, S. Exc. Mgr. Gustave Mutel, Paris, 1935. 그의 권위주의적이며 성직자중심(Clericalism)적인 교회사목과 敎階制度를 강조하는 교회운동은 조선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특이한 영향을 미치게 했다. 가혹한 박해시대에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자세로 목숨을 걸고 박해에 맞서면서 교회발전에 헌신적이던 조선교인들로 하여금 차차 성직자의 영향력에 안주하고 순종적·소극적·퇴영적인 신앙자세에 젖어들게 하였고, 내세지향적인 個人救靈 신앙, 초월주의적 신앙으로만 흐르게 되는 신앙자세를 낳게 했다. 한편 그의 철저한 정교분리의 사목방침은 서구신학의 聖俗二元論을 수용하고 초월주의적·경건주의적 신앙의 충직한 봉행에 치중하던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성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동시에 신앙자유정책 구현 후 새로운 박해자로 등장할 일제 침략세력으로부터 한국천주교회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계책이기도 했다. 뮈텔주교는 정치에 대한 비판과 항쟁을 금지하는 사목방침을 취하며 일제에 대한 타협 내지는 그들의 조선침략정책에 대한 체제옹호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202)Mutel主敎는 비정하리만치 철저하게 정교분리의 사목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는 교인들이 항일투쟁에 나서 교회에 難境을 초래하게 됨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그 하나의 예로 安重根義士가 하얼삔에서 伊藤博文을 포살하고 체포된 후 旅順監獄에서 재판받고 1910년에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을 때 최후의 告解를 위해서 그에게 洗禮를 베풀어 주었고 또 그 동안 뒤에서 후원해 주던 Wilhelm 신부를 旅順으로 오도록 간청한 일이 있었는데 Mutel주교는 朝鮮敎區 책임자로서 Wilhelm신부의 旅順行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Wilhelm신부가 이 명을 어기고 旅順에 가서 사형 전의 安重根義士를 만나자 Mutel주교는 Wilhelm신부의 聖事權을 정지시키고 프랑스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물론 조선교구 소속의 프랑스인 성직자나 조선인 성직자 가운데 한말 사회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만행에 대해 음성적인 반대나 저항을 시도한 예가 없지 않았다. 교구장의 이러한 사목방침에도 불구하고 일제침략으로 가물거리는 조국의 운명을 돌이키고자 하는 조선인 신자들의 구국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었다.203)豊水院聖堂의 본당신부이던 鄭圭夏신부가 의병을 격려하고 자금을 대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운 바 있고, 천주교인 安重根의 의거와 安明根의 安岳事件과 李基唐의 南滿州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이나 國債報償運動을 선도한 大邱의 교인 徐相燉(敦) 등의 일은 유명하다. 그 밖에 黃海道와 間島지방에서도 천주교인들이 주도한 항일운동이 한말, 일제 초기에 걸쳐 끊임없이 전개된 바 있다(盧吉明,≪가톨릭과 朝鮮後期 社會變動≫(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266∼274쪽). 조선인 성직자들은 교구장의 엄격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직접적인 정치참여나 저항투쟁보다 의거·의사의 막후 지원이나 교육사업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형태로 구국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었다. 이러한 한말 교회의 존재는 조여드는 일제 침략세력 앞에 놓였던 조선인의 절박한 위기의식 속에서 구국투쟁과는 거리를 느끼게 하는 것으로 비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제도교회로의 발전과 달리 민족교회로의 사회적 기대치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었다. 한말의 한국천주교회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는 사목방침의 고수와 개인구령적 경건주의신앙·몰사회적 영혼의 悅福이나 소박한 내적 안식, 세속과의 절연, 사회 무관의 초월주의적 신앙자세로 비춰지면서 민족교회로의 발전이나 사회흡인력의 강화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으며, 천주신앙으로의 입교율이 체감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204)1900∼1904년 그리스도신앙인의 연평균 증가율은 가톨릭 10.19%, 장로교 14.95%, 감리교 12.58%로 모두가 10%를 약간 상회하였으나, 1905∼1909년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가톨릭 2.24%, 장로교 43,77%, 감리교 49.75%로 가톨릭은 매우 저조한 반면에 개신교의 신자 증가율은 놀랄 만큼 상승한 것으로 나타난다. 가톨릭의 경우에는 乙巳條約이 체결된 1905년 이후 1년간은 오히려 신자수가 감소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盧吉明, 위의 글, 286∼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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