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의 유교적 전통교육과 다른 그리스도적 가치체계에 터전한 교육활동은 천주교에 의해 그 단서가 열린다. 천주교 사목자의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과 교인자제나 서민대중을 상대로 한 근대지향 교육활동이 각지에 산재되어 있던 천주교회를 배경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적 초등사학 활동은 각지로 급속히 파급되면서 봉건적 전통사회의 변성촉매로도 작용하였던 것이다. 천주교회의 신학교육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특수교육의 국면이지만 이미 박해시대로부터 신학생을 해외신학교로 파견하는 국면과 국내에서 비밀리에 신학생을 교육하거나 신학교를 설립하는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신학생의 해외유학은 일찍이 1835년에 김대건 등 세 소년이 중국 남단 澳門(Macao)으로 파견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는 서양학을 배우기 위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해외파견이었다.205)①金大建, ②崔良業, ③崔方濟 등 세 신학생이 유학하였으나 ③은 면학 도중 현지에서 병사하고 ①은 1845년, ②는 1849년에 上海에서 서품되어 한국인으로서 첫째와 둘째의 邦人聖職者가 되어 활동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써 유학의 단서가 열리자 1854년과 1858년에는 각각 3명의 신학생을 멀리 말레이지아의 Penan(彼南)으로 유학시켰으며,206)1854년 11월 4일에 작성된 崔良業신부의 서한에 세 신학생을 上海로 유학시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林忠信·崔奭祐 譯註,≪崔良業神父書翰集≫, 한국교회사연구소, 153∼155쪽). Penan으로 유학했던 이들은 林빈첸시오 金요한, 李바울리노였다(朱在用,≪배론(舟論)聖地≫, 가톨릭출판사, 1975, 133쪽). 개항한 후인 1882년부터 3년에 걸쳐서는 조선의 종교활동을 사목할 본방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도합 21명의 신학생을 역시 페낭으로 유학시킨 일이 있었다.207)1882∼1884년 사이에도 朝鮮神學生을 계속 Penan에 유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1885년 原州 부흥골에 신학교가 개설되자 차차로 귀국하였고, 후에 龍山의 예수聖心神學校에서 계속 수학하고 몇 명은 서품 받고 모국교회를 위해 활동하였다(≪가톨릭 朝鮮≫1935년 9·10월호, 朝鮮神學校의 由來, 平壤敎區).
천주신학을 국내에서 교육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Imbert)주교였다. 그는 앞서 마카오로 유학보낸 金大建 등 소년 신학생과는 별도로 1838년경 丁夏祥 등 네 명의 교인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직접 교육하기 시작했으나, 다음해에 벌어진 己亥迫害로 관계자가 모두 순교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208)≪가톨릭大學史資料集≫(가톨릭大 出版部, 1991), 54쪽. 그러나 이는 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된 토대 위에서 실시된 교육이 아니었다. 박해시대의 조선에 최초의 신학교가 설립된 것은 1856년의 일이다.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주교가 충청도 산협인 배론(舟論―현 忠北 堤川市 鳳陽邑 九鶴里)에 ‘聖요셉神學校’을 설립한 것이 효시였다.209)배론의 聖요셉神學校는 교장 Pourthie신부, 敎授神父 Petiniclas교수가 10명내외의 신학생을 상대로 교육활동을 폈다. 1866년 丙寅迫害 때 두 신부와 신학교의 명의상 주인이던 張樂紹가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위의 책, 46∼51쪽). 그러나 이 학교는 1866년의 병인박해로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국내에서의 신학교육이 재개된 것은 1885년의 일로, 原州 부흥골(現 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坪里)에 설립된 이른바 ‘부흥골신학당’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210)위의 책, 61∼64쪽. 비밀리에 개교된 부흥골신학당은 한불조약체결로 전교활동의 자유가 약정된 후인 1887년에 서울 龍山으로 이설되어 ‘예수성심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재개교되었다. 이 학교는 한국천주교회 邦人聖職者 양성의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 서울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으로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211)위의 책, 65∼375쪽.
이상의 신학교육은 물론 천주교의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활동이다. 그러나 신학을 전공하기에 앞서 그 기초교육으로 근대 서양의 기초적 인문교육과정을 이수시키고 있었다는 점에서, 천주교 신학교육은 개항 전후기에 운영된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인문학교육의 마당이기도 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봉건적 전통사회에서의 서민자제를 대상으로 서구적 내용을 담은 초등교육 실시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서양에서도 각 교회 부설의 敎理學校가 아직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던 서양중세 서민자제를 대상으로 하여 읽기·쓰기·노래부르기 같은 초등교육을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에 겸하여 실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교육사적 기여가 서양교육사상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도 전교자유의 시대에 접어들자 교리교육과 더불어 초등교양을 주기 위한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초등교육의 효시는 1882년에 리델주교가 시작한 서울의 仁峴學堂(인현붓재글방)이었다. 소수의 교인자제를 수용하여 시작된 이 인현학당은 전통적 한학교육과 그리스도적인 서양교양을 심어 주는 일종의 ‘改良書堂’적 성격을 띤 교육의 장이었다. 인현학당은 다음해 鐘峴聖堂 부지 안에 옮겨져 ‘鐘峴學堂’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종현학당(漢韓學堂이라고도 함)은 1909년에 시행된 정부의 학제규정에 따라 啓星學校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다.212)≪韓國샬트르聖바오로修女會 100년사≫(샬트르聖바오로회, 1991), 195∼198쪽. 차차 각지에 세워지는 교회 부설의 학당인 소규모의 학교들은 천주교신자의 교리학습을 위한 기초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개화의 시대 조류에 따라 어린이들에게 근대적 초등교육도 실시하는 이중의 의의를 지닌 교육의 장이었다.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라 각지의 천주교회는 교회 부설의 학당을 설치 운영하는 열의를 보였고 이 열의는 각지로 번져 갔다. 한말의 애국계몽기에는 더욱 교육활동에 힘쓰게 되었다. 1900년의 교세통계에 의하면, 본당(천주교회) 40개에 부설학교가 61개나 되었다고 하며, 1910년에는 전국 54개 본당에 124개의 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교육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한다(본당에 학교가 2개 이상이던 것은 본당과 그 하부교회인 公所에서도 학교를 설립 경영한 때문이다).213)開化期 天主敎會의 敎育活動 統計(1882∼1911).
적요
연도남 학 교
여 학 교
합 계
본당수
학교
본당
학 교
학 생
학 교
학 생
학 교
학 생
82∼83
1
11
·
·
83∼84
1
29
·
·
84∼85
1
21
·
·
89∼90
17
176
·
·
13
1.31
90∼91
30
177
·
·
14
2.14
91∼92
28
188
·
·
18
1.56
92∼93
36
246
·
·
18
2.00
93∼94
40
293
·
·
18
2.22
94∼95
21
205
·
·
17
1.24
95∼96
21
204
·
·
19
1.11
96∼97
31
333
·
·
24
1.29
97∼98
35
329
·
·
28
1.25
98∼99
35
274
·
·
31
1.13
99∼00
59
481
·
·
35
1.69
00∼01
73
657
3
60
76
717
40
1.83
01∼02
50
544
3
79
53
623
48
1.10
02∼03
85
695
3
82
88
777
48
1.83
03∼04
73
648
2
45
75
693
48
1.56
09∼10
114
2573
10
475
124
3048
54
2.30
10∼11
106
2198
11
709
117
2907
59
1.98
*전거:韓國敎會史硏究所 소장 朝鮮敎區 敎勢統計表에서 재정리.
*1885∼1888, 1905∼1909 통계누락.
이처럼 교육사업이 활발해지자 근대적 전문지식을 지닌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師範敎育과 근대적 技術敎育을 실시하기 위해 한국천주교회의 사목책임을 지닌 뮈텔주교는 마침내 교육사업면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계의 성베네딕트(聖芬道)수도회를 한국으로 유치하였다. 뮈텔주교의 요청에 의해 1909년에 한반도로 진출한 베네딕트회는 다음해인 1910년에 崇工學校, 1911년에는 崇信學校를 세워 목공기술과 사범교육이 실시되게 하였던 것이다.215)聖芬道會(베네딕트회 Benedictine Order O.S.B)는 Mutel主敎 요청에 의해 1909년 2월에 한국에 진출, 그들이 운영하게 되었던 교사양성의 학교인 崇信學院은 1913년 폐교됨으로써 교사양성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崔奭祐,<韓國芬道會의 初期修道生活과 敎育事業>,≪史學硏究≫36, 1963, 韓國史學會). 한편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이후 안중근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교회가 대학을 설립해 줄 것을 제기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요청은 뮈텔주교에 의해 묵살당하고 말았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