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 6) 근대 천주교회의 사회적 기여
  • (3)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의 전개

(3) 근대적 사회복지사업의 전개

끊임없는 회개와 평화를 추구하며 사랑의 나눔을 가르치는 가치의식에 터전한 한국천주교회는 박해시대로부터 사회복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런 관심은 ‘지상교회’로 공적 활동을 펴게 됨에 따라 아동·노인·빈민을 대상한 사회사업기관을 설립 운영하게 되었고 조직적으로 의료사업을 펴게 된다.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학정과 거듭되는 자연재해 그리고 콜레라 같은 질병의 유행으로 농촌사회에서는 棄兒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들 기아에 대한 교회의 손길이 1854년경 ‘聖嬰會’의 설립에 의해 규모는 큰 것이 아니었으나 고아구제사업이 시작되었다. 즉 박해의 고난 가운데서도 프랑스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아 기아를 거두어 신자 가정에 위탁 양육하는 아동복지사업을 추진하였다. 1859년의 선교활동 보고서에 의하면 의탁아동 양육수가 43명이었다 한다. 성영회의 규약이나 아이를 데려오고 또 양육을 의탁하는 규식의 내용을 보면 단지 고아들의 의식주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을 가르치고 취업을 알선해 주도록 되어 있으니 그 활동을 근대적 아동복지사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업은 병인박해로 인하여 중도에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220)盧吉明,<韓國가톨릭敎會의 社會·文化活動>(≪가톨릭과 朝鮮後期 社會變動≫, 高大 民族文化硏究所, 1988), 189∼195쪽. 한편 聖嬰會(Saint Enfant)는 1843년 프랑스에서 창설된 兒童福祉事業團體였다. 1852년에 조선에 입국한 Maistre신부가 우리 나라 처지를 감안하여 파리에 있는 聖嬰會 본부에서 재정적 원조를 청하여 조선에서 활동을 펴게 되었었다(Ch. Dallet 著, 崔奭祐·安應烈 譯,≪한국천주교회사≫하, 209∼210쪽).

1884년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白)주교는 아동구제사업에 관심이 컸다. 그는 1885년에 서울 곤당골(현 渼洞)에 집을 구입하여 고아원을 설립하고 60∼70명의 고아를 수용하였다.221)Compte Rendu, 1885 보고서로 明洞天主敎會200年史資料集 Ⅰ輯인≪서울敎區年報(1) 1878∼1903≫(서울 明洞天主敎會, 1984), 40쪽. 해마다 수용고아가 늘어나니 교회는 이 사업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재정과 인력의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에 블랑주교는 프랑스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고아원과 양로원사업을 위해 수녀들을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1888년 프랑스로부터 수녀들이 서울에 파견되었으며 鐘峴(현 명동)에 서양식 벽돌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근대적 고아구제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블랑주교는 고아들에게 초등교육과 실업을 가르치도록 조치하는 한편, 상점·약국·목공소·철공소를 설치하고 기술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여 구제와 더불어 자활을 위한 교육에 힘쓰게 했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는 그 후 濟物浦에도 고아원 분원을 설립하게 되었으며 차차로 아동복지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시설관계로 고아원에 직접 수용치 못하고 원외에 위탁하여 돌보는 아이들도 수백에 달하였다.222)≪한국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100년사≫(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991), 156∼180쪽.

천주교회의 노인복지사업은 아동복지사업과 병행해서 전개되었다. 1885년 고아원을 설립하면서 동시에 종로 똥골(현 貫鐵洞)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수용시설을 마련하니 이것이 한국 초유의 양로원이었다. 이 양로원에는 노인 건강문제를 전담하는 施藥所까지 부설하였다.223)위의 책, 184쪽. 근대 노인복지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 양로원은 그 후 종현으로 옮겨졌다.

천주교회의 구빈활동은 먼저 같은 교인끼리 주고 받는 사랑의 나눔으로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박해의 강화로 난을 피하여 각지로 흩어져 비밀리에 이루게 된 교우촌은 신앙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공동체였다. 박해에 몰린 교도들의 동류적 공동의식의 응집력이 사랑과 물질의 나눔으로의 사회적 구빈활동의 실천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1889년 호남지방이 격심한 기근을 겪게 되었을 때 교회는 주한외교관과 구호위원회를 조직하고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224)盧吉明, 앞의 책, 221∼222쪽.

한편 구빈, 구호활동의 일환으로 施藥醫療事業도 시작되었다. 1857년에 처음 개설한 시약소는 비록 소규모였지만 지속적으로 유지되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시약의료사업이 재개된 것은 종로의 양로원에 시약소가 부설되면서부터였다. 서울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 시약소는 1898년에 진료소로 발전적으로 재편되어 의료사업을 전개해 나갔으며, 1900년에는 濟物浦에도 진료소가 설치되었다. 이들 진료소에서의 사회복지사업을 주관한 것은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였다. 수녀들은 사회사업 使徒職의 수행을 위해 아동·노인복지사업과 더불어 의료사업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여 한국 근대복지사업 발전에 잊을 수 없는 공헌을 쌓게 된다.225)한국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앞의 책, 151∼180쪽. 한편 수도회의 진료소 설치에 앞서 개신교가 설립 운영하던 廣惠院이 있었다(1888. 4. 설립).

<李元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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