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1) 기독교의 수용과 정착
  • (1) 중국과 일본을 통한 접촉

(1) 중국과 일본을 통한 접촉

한국은 조선 후기 서세동점기에 우리 나라 연안에 출몰하던 이양선을 통하여 처음으로 기독교와 접하였다. 기독교와의 최초의 접촉은 네델란드선교회 소속의 독일태생 유태계 선교사 귀츨라프(Karl Fredrich Gützlaff, 郭實獵 1803∼1851)를 통한 것이었다. 그는 마카오에서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과 친교를 맺는 한편 기독교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장 린제이(Hugh H. Lindsay)와도 교분을 갖게 되었다.226)이진호,≪동양을 섬긴 귀츨라프≫(한국감리교사학회, 1988), 39쪽.

이 무렵 동인도회사는 북중국과 조선·일본·오키나와·타이완 등지를 순항하면서 통상교역 가능성과 이에 대한 현지주민들의 관심도를 조사·보고할 책임을 부여하면서 린제이를 동사 소속 1천톤급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The Lord Amherst)의 선장에 임명하였다. 귀츨라프는 린제이로부터 통역 겸 船醫로 동승해 줄 것을 제의받고 모리슨으로부터 받은 한문성서와 전도문서 등을 갖고 승선하여 항해에 나서 1832년(순조 32) 7월 황해도 백령도에 기착하였다.227)白樂濬,≪韓國改新敎史≫(延世大 出版部, 1973), 41쪽. 일행은 주민들과 필담을 나누고 책과 물건을 나누어 주면서 현지인들과의 접근을 시도하였으나 주민들이 서양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한 나머지 물건들을 되돌려 주고 지방관과의 면담 주선도 거절하므로 당국자와의 교섭에 실패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운항을 계속하여 그 해 7월 하순 충청도 홍주만 古代島에 정박하여 홍주목 관리들을 만나 왕에게 보내는 서신과 성서 등 선물을 국왕에게 전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서울로부터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일행은 현지 주민들과 접촉을 계속하여 한문 전도문서를 나누어 주고 주민들을 선상에 초대하는 한편 지방관들의 식사초대에도 응하는 등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228)金良善은, ‘귀츨라프 일행은 현지주민에게 의약품을 나누어 주는 한편 洪州牧使 李敏會와 水軍虞侯 金瑩綬를 통하여 純祖에게 西洋布, 時辰表, 千里鏡, 聖書, 敎理書 등 수십종의 獻上品과 영국과의 통상을 요청하는 上奏文을 올렸다’고 하였다(金良善,≪韓國基督敎史 硏究≫, 基督敎文社, 1971, 42쪽).

그러나 8월 9일 서울에서 역관을 대동하고 온 왕의 특사는 선물을 되돌려 주면서 중국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음을 통고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조정의 회답을 이유로 장기간 기다리게 한 책임을 묻는 한편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님을 주장하였지만 일개 지방관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식량과 식수를 공급받은 후 조선해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에 대한 선교는 뜻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그의 여행기229)K. F. A. Gü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s, London, Frederich Westley & A. H. Danis, 1834.가 출간되어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심과 선교 열의가 높아졌다.

이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866년(고종 3)에 조선은 영국 會衆敎會(Congre­gationalist)의 중국주재 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托馬浚 혹은 崔蘭軒, 1840∼1866)를 통하여 다시 기독교와 접할 수 있었다. 토마스는 자신의 임지인 상해에서 선교회 현지 책임자와의 불화 등으로 일시 芝罘의 청국해관 통역연수관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책임자 윌리엄슨의 소개를 받아 조선에서 박해를 피해 밀항해 온 천주교신자들230)김양선은 이들을 金子平·崔善一이라고 말한다(金良善, 위의 책, 48쪽).을 만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조선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토마스는 이 천주교신자들의 안내를 받아 목선으로 1865년 9월 13일 서해안 紫羅里231)황해도 松川〔솔내〕설, 옹진설, 백령도설 등이 있다.에 기착하였는데 그 해 12월 산동반도 동남단 貔子窩에 귀환할 때까지 두 달여간 연해민들에게 한문성서 등을 나누어 주는 한편 한국어와 한국사정에 관한 많은 지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는 북경에 귀임하여 런던선교회가 운영하는 중서학원(Anglo-Chinese College) 임시원장직에 있으면서 1865년 겨울부터 다음해 4월경까지 조선동지사 宿廳과 선교회 사무실을 오가며 동지사 일행과 접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토마스는 박해를 피하여 조선을 탈출한 리델신부 등으로부터 한국에서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자세히 들었으나 개신교에 대하여는 박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신부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로즈(P. G. Rose)제독으로부터 통역으로 동행해 줄 것을 요청받은 토마스는 이를 수락하고 芝罘에 왔으나 프랑스함대의 출동이 연기되자 미국인 프레스톤(Preston) 소유의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에 탑승하여 1866년 8월 조선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대동강 입구에서 평안도관찰사 박규수의 퇴거명령을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하므로 평양관민의 화공을 받아 침몰하고 토마스와 승무원들이 처형되는 이른바 ‘셔먼호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27년 후인 1893년 평양에 온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모페트(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는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토마스로부터 중국어 성서를 건네 받았다고 하는 한 조선인 신자를 만난 사실을 증언함으로써232)白樂濬, 앞의 책, 48쪽. 토마스의 순교를 통하여 개종자가 생기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중국이 개항하자 1860∼1870년대에는 만주지역 개항장 營口를 중심으로 영국계 장로교회의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앞서 토마스의 조선행을 주선해 준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은 開市場을 왕래하는 조선상인들에게 漢譯 성서를 나누어 주는 한편 북경에서 런던선교회를 왕래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한 동지사 金益文 등을 통하여 국내사정을 파악하여 그의 저서233)Alexander Williamson, Journeys in North China, Manchuria, and East Mongolia, with some account of Corea, London, 2 vols., 1870.에 기술함으로써 서구 기독교계에 조선을 소개하였다.

만주 牛莊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 로스(Joel Baker Ross)는 1871년 가을과 72년 봄 한만국경 開市場에서 조선 상인들로부터 국내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로스는 자신의 조선어 개인교사가 된 의주상인 李應贊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白鴻俊·李成夏·金鎭基·李益世 등과 함께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受洗者가 되었다. 이들은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진행중인 성서 한국어 번역사업에 참가하여 1882∼1884년에 이르는 동안<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사도행전>등을 譯刊하였다.234)金良善,<Ross Version과 한국 Protestantism>(≪白山學報≫3, 1967), 424쪽. 이어 만주 일대에서 紅蔘행상을 하던 徐相崙·景祚 형제가 개종하여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서북지방 상인들이었던 이들 중 일부는 로스의 勸書人이 되어 만주 일대 한인촌과 국내에 한글성서를 보급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미국선교부의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 또 하나의 경로는 일본을 통한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임오군란 후 수신사 閔泳翊의 개인 隨員으로 도일하였던 李樹廷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일행이 귀국한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서 저명한 농학자이며 기독교계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津田仙과 교유하였으며 일본인 목사 安川亨으로부터 성서와 교리를 배우고 1883년 4월에는 세례를 받았다235)李光麟,<李樹廷의 人物과 그 活動>(≪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81), 134∼241쪽. 이수정은 일본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의 요청으로≪懸吐漢韓新約聖書≫간행업무에 종사하였으며 1885년에는 橫濱에서≪마가복음≫을 韓譯하여 1,000부를 간행하였다. 이 때 일본 기독교계에서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수정은 당시 한일간의 정치적 갈등을 고려하고 또 미국으로부터의 직접 수용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재일미국인 선교사 낙스(George W. Knox), 루미스 등에게 대필시켜 1883년 3월과 12월에≪세계선교평론≫(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과≪해외선교사≫(The Foreign Missionary) 등 선교계 잡지에 ‘한국의 사정’이란 호소문을 게재하여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해외 기독교계에 호소하였다.236)吳允台,≪日韓キリスト敎交流史≫(東京;新敎出版社, 1968), 87∼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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