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1) 기독교의 수용과 정착
  • (2) 한미수호조약의 채결과 미국의 대한선교

(2) 한미수호조약의 채결과 미국의 대한선교

1882년(고종 19) 5월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선정부는 다음해 7월에 민영익을 전권사절, 홍영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특별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다.237)崔文衡,<修交直後의 韓美關係와 使節交換>(≪한미수교 100년사≫, 국제역사학회의 한국위원회 1982), 71∼81쪽.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일행은 9월 4일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하여 뉴욕으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미국감리교회의 목사이며 후에 볼티모어대학을 창설한 가우처(John F. Goucher)박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가우처는 3일간에 걸친 한국사절단과의 열차여행 기간중 한국사정을 소상히 접하게 되었으며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1883년 11월 미국감리교 해외선교본부에 재일선교사들이 지장이 없겠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선교사업을 ‘隱居의 나라’에 뻗쳐서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수립하기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2,000달러(弗)의 선교기금을 기탁하는 한편 재일감리교선교회 대표자 매클레이(Robert S. Maclay)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을 직접 답사하도록 권하였다.238)白樂濬, 앞의 책, 81∼82쪽.

한미간에 정식국교가 수립되어 서울에 미국공사관이 설치되고 양국사절이 교환되는 등 외교관계가 진전되자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의 해외선교부는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는데 따른 위험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선교사업 개시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맥클레이가 선교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1884년 6월에 입국하였으며,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그 해 9월 중국 상해주재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매클레이는 약 2주간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에서 수차 접촉한 바 있는 김옥균을 통하여 조선에서 미국인들이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서한을 왕에게 올렸다. 고종의 윤허를 전하는 김옥균과의 면담 상황을 매클레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옥균은 우리를 매우 정중하게 맞았다. 이어서 폐하께서 나의 편지를 신중히 검토하신 후 나의 요구대로 (미국) 선교부가 조선에서 병원과 학교사업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사업을 우선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Robert 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96, Apr., p. 289).

기독교 선교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들의 국내에서의 교육·의료사업이 일단 허용된 것이다.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의 국왕 알현에 통역으로 배석하였던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주상께서 미국상선의 내해 항해와 미국인들이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는 일과 전신 설치의 일을 허락하시다”239)尹致昊,≪尹致昊 日記≫, 1884년 7월 4일.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알렌은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 미국공사관 公醫신분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집안에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서울에서의 그의 유일한 종교활동이었다. 한국에서의 가톨릭교회의 수난과 순교에 관해서 익히 알고 있던 당시 선교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국정부가 과연 기독교 선교를 승인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1884년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에서 정권의 실력자이며 한미수호조약체결 후 報聘使로 미국을 방문한 바 있는 민영익이 개화당 자객들의 습격을 받아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알렌이 그를 치료하여 완쾌시킨 것을 계기로 선교사들에 대한 왕실의 신임이 커지므로 자유로운 선교활동의 가능성이 커졌다. 왕은 알렌이 ‘선교사임을 알면서도’ 시의로 임명했을 뿐 아니라 정변 때 피살된 홍영식의 저택을 주어 병원을 설립하도록 허락하므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240)이만열,<선교초기의 의료사업>(≪한국기독교수용사연구≫, 두레시대, 1998), 250∼256쪽. 이와 같이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개종자들이 생기고 이들에 의하여 성서가 번역되어 국내에 유입되는 한편 한미수교를 계기로 정부가 미국선교사들의 활동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등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 여건이 성숙되고 있었다.

한국선교 착수 여부를 관망하고 있던 미북장로교와 북감리교본부는 한국이 다시 종래의 排外政策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아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를 각각 최초의 주한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감리회의 스크랜턴(M. F. Scranton)부부, 장로회의 헤론(J. W. Heron)부부 등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여 선교사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구미 각국의 선교단체가 다음<표 1>에 보이는 바와 같이 잇따라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선교개시
연도
선 교 회 선 교 사
1888 캐나다장로회 게일, 펜윜, 하디, 애비슨, 매켄지, 그리어슨, 맥레, 푸트
1889 오스트레일리아장로교회 데이비스, 메리 데이비스 남매
1892 미국남장로회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1895 엘라딩 기념선교회 E. C. Paulling, A. Gadeline
1896 미국남감리회 리드
1896 풀리머스형제단 乘松雅休, 브랜드(H. G. Brand)
1898 캐나다장로회 게일, 펜윜, 하디, 애비슨, 매켄지
1904 제7일안식교 國谷喜之介, W. S. Smith
1907 동양선교회 金相濬, 鄭彬

<표 1>구미 각국 선교단체의 선교사파견 현황

1889년에는 영국성공회와 러시아정교회의 선교가 각각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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