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2) 교회의 발전
  • (1) 교회의 설립과 교단조직

(1) 교회의 설립과 교단조직

1879년 만주에서 白鴻俊·李應贊 등 4명이, 1882년에는 金靑松·徐相崙 등 로스·매킨타이어의 성서 한국어 번역에 참여하였던 서북지방인들이 각각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후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인 신앙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營口에서 시작된 신앙집회는 奉天·集安 등 서간도지역과 의주·강계·자성·초산·벽동·후창 등 압록강 연안으로 퍼져 나가 이들 지역에 가정교회 형태의 신앙집단들이 생겨났다.241)이덕주,<한국기독교 초기신앙공동체 형성과정>(≪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13쪽.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서는 장로교 선교사 낙스(G. W. Knox)에게 세례를 받고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 루미스(H. Loomis)와 함께 성서를 한역 출간242)한국에 온 첫 선교사 Appenzeller와 Underwood는 그 해 2월 橫濱에서 인쇄된 그≪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갖고 입국하였다(이만열,<이수정의 개종과 활동>, 앞의 책, 122∼123쪽).한 바 있는 이수정이 중심이 되어 10여 명이 참여하는 신앙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형성된 신앙공동체는 만주의 그것과 같이 계속되지 못하였고 국내로 전파되지도 못하였다.

만주에서 개종하여 매서인으로 국내에 파견된 서상륜·백홍준·최성균·이성하 등의 전도로 많은 세례지망자들이 나타났으며 황해도 소래에서도 신앙집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최초의 교회는, 이들 ‘봉천에서 로스의 파견을 받아 국내에 들어온 사람의 사촌들이 장로로 선출된’243)J. Ross, The Christian Dawn in Korea,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Apr. 1890. p. 247. 1887년 9월 27일, 14명의 한국인 개종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언더우드에 의하여 창립된 정동장로교회(현재의 새문안교회)이다.244)새문안교회역사편찬위원회, (≪새문안교회100년사≫, 1995) 91쪽. 같은 해 10월 9일 아펜젤러에 의하여 최초의 감리교회가 창립되었다. 창립예배에는 만주에서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은 ‘서(Sye)씨’,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과 한용경, 로스목사로부터 추천받은 매서인 최(Choi)씨와 장(Chang)씨, 그리고 매서인 ‘최씨부인’ 등이 참석하였다. 최씨부인은 1887년 10월 23일 한국개신교 최초의 여성 세례자가 되었다.245)이덕주, 앞의 책, 22∼25쪽.

이어서 1893년에 장로회의 공동골교회, 평양 대동문교회, 부산교회, 군산교회가 설립되었고 1894년에 약연교회와 장연의 소래교회가, 1895년에는 연못골교회가 설립되었다. 감리회는 동대문교회(Baldwin Chapel)가 1892년에, 상동교회와 제물포교회가 1893년에 각각 설립되었다.

이후 교세가 점차 확장되어 1910년 현재 장로교공의회 소속교단은 선교사 67명, 한국인 사역자 36명, 미조직 교회를 포함한 예배소 287개소246)朝鮮耶蘇敎書會(≪長老敎會史典彙集≫, 大正 7). 209쪽.를, 북감리교는 9개 지방 66개 조직교회에 선교사 28명 한국인 사역자 137명, 신도24,700여 명을 확보하게 되었으며247)基督敎大韓監理會 100周年記念事業委員會編, Official Journal of the Korea Annual Conference. pp. 138∼139 Statistics. 교세가 증가함에 따라 장로교와 감리교 등의 교단조직이 확립되었다.

1889년 호주장로교의 데이비스(J. H. Davis)가 입국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자 미북장로교선교부와의 협의체로 한국선교연합공의회(United Council of Missions in Korea)가 설치 운영되었으나 1890 데이비스의 사망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 후 레이놀즈(W. D. Reynolds) 등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893년 1월에는 미국남·북장로교선교회간에 선교협의회(Council of Mission)가 조직되고 ‘장로교 정치체제를 채용하는 선교부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창설되었는데 여기에는 캐나다·호주장로교를 포함하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가 참여하였다. 1900년까지는 선교사들만이 참가하는 선교사공의회, 이후는 한국인 지도자도 참가하는 장로회공의회(合同公議會 혹은 宣敎師及朝鮮人總代合成公議會·韓宣連席會議)로 운영되었다. 공의회에 참여한 4개 교단 선교부는 ‘독립한 한국장로교회’를 설립한 것을 본국 각 교단본부로부터 승인받고 1907년 9월 평양 장대재예배당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老會를 창설하였다.

북감리교선교부는 1897년 한국선교회(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와 그 산하에 서울구역회(Seoul Circuit)를 조직·운영하였는데 1900년에는 한국선교지방 산하에 9개의 구역을 설치하였고 1901년에는 인천의 한국서지방회, 평양의 한국북지방회, 서울의 한국남지방회의 3개의 지방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1905년에는 선교회가 선교연회(Annual Session Korea Mission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로 발전하였다. 1896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남감리교 선교부는 이듬해 조선선교회(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를, 1918년에는 남감리회조선매연회(Korea Annual Conferenc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를 조직하여 1939년 남북감리교가 통합되어 基督敎朝鮮監理會를 성립시키기까지 계속되었다.248)基督敎大韓監理會 100周年記念事業委員會編,≪朝鮮監理會年會錄≫vol. 1·6·7(19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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