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2) 교회의 발전
  • (3) 네비우스선교방법과 대부흥운동

(3) 네비우스선교방법과 대부흥운동

초기 한국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오기 전에 전문적인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현지의 언어·문화 등에 대한 이해나 牧會 경험이 부족한 인사들로서 다만 신앙적 정열만을 가지고 임지에 나온 젊은 목회자들이었다.255)이만열, 앞의 책, 336∼337쪽. 또한 각각 다른 신앙과 교리적 배경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파견한 선교부가 각각 달랐으므로 선교활동 과정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주 갈등을 일으켜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854년 이래 30여 년간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노련한 미국북장로회소속 선교사 네비우스(J. L. Nevius)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약 2주간 한국에 머물면서 재한 선교사들과 선교전략을 협의하고 선교방법을 제시하였다. 흔히 自進傳道·自力運營·自主治理로 요약되는 이른바 이 네비우스선교방법은 1891년 북장로회선교회규칙과 1893년 한국장로교선교부공의회가 채택한 정책들에 반영되었으며 이후 재한개신교 각 선교부의 선교원칙으로 정착되었다.

본국인 신자를 통하여 전도하되 신자들은 자기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웃에게 전도하도록 하며, 한국교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교회 治理방법과 치리기구를 설치하며, 경제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전도전담자를 채용하게 하고, 교회 건물은 한국교인 스스로 짓도록 한다는 등의 이 네비우스선교방법 원리는 한국기독교인들에게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기독교윤리를 가르치고 자립정신과 헌금의 습관을 가르쳐 교회의 서양화를 방지하는 등 교회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56)金良善, 앞의 책, 73쪽.
白樂濬, 앞의 책, 306쪽.
민경배,≪改正版 韓國基督敎會史, 1982≫, 195쪽.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도 나타났다. 남장로회선교부 소속의 영향력 있는 선교사 레이놀즈(W. D. Reynolds)는 네비우스선교방법에 기초하여 작성한 한국인 교역자 양성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 외국재정을 가지고 그를 講道師나 傳道師로 채용치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 ◦ 선교초창기에는 그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미국에 보내지 말 것 ◦ 기독교인의 교양과 현대문명이 향상됨에 따라서 한국인 목회자의 교육정도를 높일 것, 그의 교육은 일반에게 존경을 받고 권위가 설 수 있도록 한국인의 평균 교육수준보다 약간 높을 만큼하고 너무 지나쳐서 일반이 猜忌心이나 離脫感을 가지지 않도록 할 것. ◦ 어떤 특정인을 교역자로 양성할 저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방에게는 오랫동안 그 생각을 알리지 말 것.  (白樂濬,≪韓國改新敎史≫, 226쪽).

한국교회 지도자의 교육수준을 교인들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설정함으로써 그 자질을 제도적으로 규제하려고 한 것이다. 당시 한국교인들의 지적 수준이 매우 낮은 상황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선교사들의 그것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한국인 지도자들은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지식인 일반으로부터 ‘목사·장로와 같은 교회지도자들 자신이 현대문명과 과학에 대하여 이해가 없기 때문에 이를 세상지식이라 하여 천하게 여긴다’257)李光洙,<今日 朝鮮耶蘇敎會의 缺點>(≪靑春≫11. 1917. 11).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후대의 선교사들까지도 ‘교회조직과 예배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별개의 공동체가 되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으로 흘렀으며’258)W. Scott, Canadians in Korea, p. 53.
한국기독교사연구회, 앞의 책, 225쪽에서 재인용.
교회 외의 문제에 대하며 무관심하고 소극적이며 사회적·민족적 모순에 대하여 외면할 수밖에 없는 병폐를 체질화하게 된 것으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1900년대 초 일종의 영적 각성운동으로 기독교계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03년 원산지역 선교사들이 그들의 선교활동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데 대한 자기반성의 취지에서 개최한 기도회에서 비롯되어 1907년에 평양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원산지역 선교사들과 한국교인들이 참석한 이 기도회에서 남감리회소속 하디(R. A. Hardie)는 선교활동에서 소기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이유를 자신의 허물, 즉 한국인들에 대한 백인으로서의 우월감과 권위의식·자만심에 있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반성하는 공중기도를 올렸다. 이러한 자기반성은 선교 초기의 열정과 한국인들에 대한 겸허하고 소박한 선교열이 식어지고, 호화사치한 생활로 한국인들에 대하여 우월적 자만심을 갖게 된 데 대한 자기반성이기도 하였다.259)이만열,<선교사의 洋大人化 과정>(앞의 책), 184∼192쪽 참조. 또한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외국인배척운동에 직면하고 있던 중국주재 선교사들이 어려운 여건을 감내하면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자신들은 좋은 선교여건에서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자책과 반성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평양과 삼남지방에까지 전파되었다. 부흥집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후에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된 吉善宙 등이 주도한 査經會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이러한 사경회에서는 선교사와 한국교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기도와 고백으로 일주일 정도 진행되었는데, 崇實·崇德·光成 등 선교계 학교의 학생들은 수업을 전폐하고 참가하였으며 여성만을 위한 특별여자사경회도 개최되었다. 평양 등 대도시에서 개최되는 사경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운집하였다. 1907년 부흥운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한국교회의 교세는 다음<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05년의 그것에 비하여 평균 267%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260)H. G. Underwood, The Call of Korea,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08, p. 148.

연 도 교회수 전도소 세례교인 학습교인 헌금(원)
1905 321 470 9,761 30,136 1,351,867
1907 642 1,045 18,964 99,300 5,319,785
증가율(%) 200 223 194 329 393

<표 3>1905년과 1907년 한국교회 교세대비표

이 1900년대 부흥운동은 기독교의 순수신앙과 그 정신이 한국기독교에 뿌리내리고 한국인 신자들과 선교사들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며 개인의 내면의 죄를 고백함으로 교인들의 도덕성이 강화되고 경건성을 구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사경회의 형식을 통하여 성서연구에 대한 열의가 고조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복음주의적 한국교회의 정형을 이룩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261)한국기독교사연구회, 앞의 책, 273∼275쪽.

그런데 부흥운동이 전개된 1900년대의 국내의 정치상황은 1904년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1905년 을사조약이 勒結되어 일제에게 사실상 국권을 강탈당하였으며 1907년에는 고종이 강제 폐위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는 등 국운이 위태로운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미국 선교사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한국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부터 교도들의 관심을 彼岸의 세계로 돌려놓음으로써 일제의 한국지배를 지원하는 본국 외교정책에 협력하는 한편 일제와의 협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대한 재한미국선교사들의 통제력을 유지·강화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262)이 문제의 이해를 위해서는 朴淳敬,<한국민족과 기독교 선교의 문제>(≪민족통일과 기독교≫, 한길사 1986), 노대준,<1907년 대부흥운동의 성격>(≪韓國基督敎史硏究≫15·16, 1987) 등 부흥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와 이와는 약간의 시각을 달리하는 閔庚培,≪韓國民族敎會形成史論≫(延世大 出版部 1974), 서정민,<초기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이해>(≪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종로서적, 1992) 등의 연구 참조. 이런 점에서 부흥운동 이후, 교회를 민족운동의 통로로 이용하고자 했던 많은 민족운동지도자들이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일시적으로 교인 수의 감소를 보였던 사실은 이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하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1880년대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1900년대에 이르러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한편 민족적·사회적 모순에 대하여 이를 외면하고 관심을 돌리려는 교회의 비정치화가 체질화되어 이후 한국교회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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