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3) 기독교와 민족의식
  • (1) 민족의식의 태동

(1) 민족의식의 태동

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말기의 한국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지배구조를 타파하고 밖으로는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위협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해야 하는 두 가지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초기 신자들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와 함께 각자의 사회적·계급적 입장에 기초하여 현실적 모순을 타개·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독교로의 개종을 모색하였다.

기독교수용 초기에 일부 전·현직관료들이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전직관료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타개할 방편을 기독교에서 구하려고 한 데 비하여 일부 현직관료들은 구국의 한 방편으로 기독교로의 개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양반관료들이 그들의 지위와 특권을 옹호해 주는 봉건지배체제를 부정·극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따라서 인간의 평등과 자유, 민권을 주창하는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며 개종을 주저하게 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263)이만열,<韓末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한국기독교와 민족운동≫, 종로서적, 1992), 19쪽. 일찍이 구미 선진문화를 경험한 서재필·윤치호 등 양반지식인들은 종교·교육활동을 통하여 문명개화를 이루고자 교회에 귀의하였으며 독립협회에 참여한 개화론자들 대부분이 후일 구국·개화의 방편으로 개종하였다.

전·현직관료들과 양반지식인 등 지배계층 인사들은 기독교를 개화와 국권수호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데 비하여, 기층민중들의 개종은 기독교 선교사들과 교회의 힘에 의지하여 관리들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보려는 동기에서 개종하여 권력의 불법에 저항하는 민권운동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서도 관장들은 해 지방 백성의 재산을 어떻게 보호를 하여 주는지 그 지방 백성들의 말이 관장의 보호를 믿다가는 큰 낭패들을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서 각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게 하자(≪독립신문≫광무 3년 8월 14).

이와 관련하여≪황성신문≫은 ‘근래 기독교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을 피하여 교회로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보도264)≪皇城新聞≫, 광무 6년 8월 16일.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 시기 일부 개종자들의 주장에는 근대 법치국가의 신체의 자유, 불법징세에 대한 조세저항을 연상케 하는 진보적인 주장도 보인다.≪황성신문≫은 교도 鄭雲復이 재판도 없이 1개월 여를 구속되어 있는데 대하여 ‘즉시 재판에 회부하여 죄가 있으면 죄를 받게 하고 무죄이면 즉시 석방하라’고 당국에 요구하는 교도들의 항의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265)≪皇城新聞≫, 광무 4년 2월 28일. 나아가 부당징세에 항의하고, 지방관의 재산약탈 사실을 내부대신에게 고발하는 등 민권운동으로 발전하는 양태를 보이고 있다.266)≪皇城新聞≫, 광무 3년 10월 16일 및 5년 12월 20일.

기독교에 귀의한 양반지배층 개종자들의 활동이 개화와 국권수호운동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반하여 민중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민권의식의 발로로 신분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엿보게 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민족적·계급적 모순구조가 교회내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무년간에 이르러서는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구조와 그 활동이 忠君愛國의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반봉건 과제보다 외세침략에 대한 대응이 더 시급한 민족적 과제였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황실의 안녕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교도들의 집회들에서 확인되는데, 당시의 언론들이 국왕이나 태자의 생일을 맞아 “각처 교당에서 교인들이 일심으로 모여서 대황제폐하의 만수무강하심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혹 경축하는 대지를 연설도 하며 혹 애국가를 노래로 하여 서로 송축하는 정성을 표하였다더라”267)≪대한크리스도인 회보≫3-35, 1899년 8월 30일.라고 한 것이나, “어저께 모화관에서 야소교회 교원들이 대군주탄신경축회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근 천명이나 모여 애국가를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성체안강하심과 조선인민의 부강함을 축수하고 전국 인민이 동심합력하여…조선사람이 외국사람에게 무리하게 욕을 보든지 곤경을 당하든지 하면 전국 인민이 자기가 당한 것과 같이 그 사람의 역성을 하고 임군과 국기를 자기 목숨들보다 더 중히 생각하며…”268)≪독립신문≫1-65, 1896년 9월 3일.라고 보도하고 있는 데서 당시 교회가 황실을 중심으로 민족적 단결을 추구하는 애국운동에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회 회원들이 먼저 대군주폐하와 전국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이런 대회를 하고 이런 뜻을 세계에 보이며 미국 교사들이 조선사람이 이런 새 생각이 생기는 것을 너무 즐거워하여 자기들을 힘껏 도와주고 이 대회가 매우 잘 되었으니…이 대회가 조선사람을 여러 가지를 가르치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위국위민하는 뜻이오 둘째는 이런 마음이 있으면 다만 마음에 먹어 둘 뿐이 아니라 세계에 광고하여 이런 마음 있는 것을 알게 하며 이런 마음 없는 사람을 있도록 감동을 시키며, 셋째는 야소교를 하여 전국인민이 층등이 없이 모두 형제같이 사랑하고 도와주어 나라이 잘 되어야 옳고 곧은 풍속과 법률이 성하게 하며…(≪독립신문≫1-65, 1896년 9월 3일).

≪독립신문≫의 위와 같은 기사는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운동이 민중의 애국심과 평등사상을 고취하고 기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것임을 전하고 있다.

교회가 주도한 천여 명의 대규모 집회를 통하여 근대적 여론형성의 통로를 열었을 뿐 아니라 이러한 민중집회는 후일 독립협회 주도하의 만민공동회와 같은 민중집회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정부를 비판 편달하고 민중을 계몽하여 정치적으로 각성시키는 역할을 하였다.269)이만열, 앞의 책(1992), 34쪽. 또한 성탄절과 敎會曆상의 각종 기념일에는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와 교도들의 가정에 국기를 게양하고 각종 집회에서 애국가를 제창하는 등 자발적으로 국가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하였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내·외의 각종 행사와 대중집회, 기독교계 학교교육을 통하여 교도들에게 근대적 가치를 가르치는 한편 교계신문을 통하여 국가경제의 위기상황과 일제의 한국침략 준비상황, 구미 선진제국의 정부형태의 소개 등 계몽적 기사를 통하여 교도들의 정치·사회적 현실인식을 높여 나갔다. 또한 교계언론들은 일제가 한국침략의 전위역을 담당할 이민을 선발·파견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한국의 풍습과 제도, 지방특산물 등을 예의 조사하고 실제로 일본이민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으며 對日무역 역조가 심화되어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이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정부가 또한 그 모양인즉 불가불 그 형편을 아는 우리 교우들이 그 직책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지라”270)≪그리스도신문≫5-10, 1901년 3월 7일.라고 기독교도들의 정치·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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