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4. 기독교
  • 4) 기독교와 한국의 근대화
  • (1) 의료활동

(1) 의료활동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서구문물을 도입·소개하고 전파함으로써 전통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한국사회를 근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기독교회의 활동은 서양의학의 도입과 보급, 근대교육기관의 설립 운영,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 각종 도서의 출판과 보급을 통한 근대과학의 도입과 한글의 보급. 문맹퇴치 그리고 재래의 각종 폐습타파와 생활의 합리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서 주로 선교사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개화기 서양의술은 개항장에 개설된 일본 해군병원을 통하여 유입된 일본계 서양의술과 서구제국과의 국교수립 이후 영국·프랑스·독일 등을 통하여 들어온 서구계 의술, 그리고 미국 개신교선교사들을 통하여 들어온 미국계 의술로 대별된다.275)趙英烈,<西歐諸國을 통한 西洋醫學의 受容>(≪國史館論叢≫9, 國史編纂委員會, 1989), 133∼145쪽. 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의학 발전에 기여한 것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도입 발전된 미국계 의료기관의 활동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의료활동은 그 자체가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276)李春蘭,<韓國에 있어서의 美國 宣敎醫療活動, 1884∼1934>(≪梨大史苑≫10, 1972), 1쪽. 그러므로 공식적인 기독교 선교가 아직 허용되지 않던 1884년 9월에 입국한 알렌은 미국공사관의 公醫로 신분을 위장할 수밖에 없었으며 뒤이어 들어온 언더우드·아펜젤러·스크랜턴 등도 교육·의료사업을 명분으로 국내 활동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갑신정변에서 부상한 민영익을 치료하여 당시 민씨정권 실력자들과 국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알렌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 개화파 인물로 정변시에 피살된 홍영식의 사저를 정부로부터 인수하여 1885년 4월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을 개설하였다. 惠民署라는 古來의 명칭이 廣惠院, 濟衆院으로 바뀌면서 개설 1년 만에 800명의 여성을 포함하여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1886년 3월부터는 한국인에 대한 의료교육을 시작하였으며 감리회의 스크랜턴(W. B. Scranton), 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 등 의료선교사들이 진료에 합류하였다. 그 해 7월 간호원 엘러즈(Miss A. J. Ellers)의 입국으로 제중원내에 부녀과가 설립되었으며 1888년에는 의학박사 호튼(Lillias S. Horton)이 부임하여 정동과 모화관에 진료소를 설치하는 한편 제중원을 구리개의 새 건물로 이전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였다.277)이만열,<초기선교사들의 활동-선교초기의 의료사업>(앞의 책, 1998), 255쪽. 1892년 제중원의 책임자가 된 빈튼(C. C. Vinton)은 자택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양쪽에서 환자를 진료하였으며 다음해 1월에는 여성들을 위하여 부인진료소(The Hugh O'Neil Jr. Memorial Dispensary)를 열었는데 개원식에는 외아문독판과 서울주재 외교사절들이 참석하였다.278)Annual Report of the Foreign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 S. A., 1893 p. 135. 같은 해에 기포드(D. L. Gifford)부인이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진료소를 서울에서, 브라운(Hugh M. Brown)이 부산에서 진료를 각기 시작하였다. 1893년 11월 1일 캐나다로부터 입국한 애비슨(O. R. Avison)이 빈튼을 대신하여 제중원 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병원의 당면 과제는 1,500달러 상당의 정부보조금이 무위도식하는 主事職 사무원들의 생활비로 낭비되고 있는 것과 보조금을 둘러싼 이들의 횡령·독직 등 부정문제였다. 애비슨은 취임 즉시 간호원 역할을 하던 妓女·醫女들과 주사직 인원을 정리하고 선교본부에 간호원의 파견을 요청하는 등 병원 운영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국립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북장로회선교부로 이관됨에 따라 병원내에서의 선교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되었으며 콜레라의 만연으로 5천여 명이 사망한 1895년에는 다른 진료시설의 선교사들과 함께 2천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1896년 초에는 화이팅(Miss Georgiana Whiting), 재콥슨(Miss Anna P. Jacobson) 등 의료진이 보강되어 제중원은 더욱 활발한 의료활동을 펼 수 있었다.

입국 초기 한때 제중원에서 알렌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던 감리회의 스크랜턴은 1885년 9월 미국으로부터 의약품과 의료기구를 들여와 사저에 독자적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미국의원시병원’·‘美國醫員施病院’·‘American Doctor's Dispensary’라는 간판을 달고 한글과 영어로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병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날이든지 낮 10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의원에게 보이시오”279)M. E. Report, for 1886. p. 272.라는 광고를 게시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다. 감리교 선교부의 시병원은 장로교의 제중원보다 더 개방적으로 운영되어 ‘움막을 치고 살거나 그것마저도 없이 살며, 아주 버림을 받아 빌어먹고 사는 제일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진료가 시행되었다.280)Ibid., p. 274. 일년 동안 여자 105명과 일본인 환자 46명을 포함하여 약 800여 명을 진료하였다. 당시 시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는, 1886년 여름에 창궐하여 수천 명이 사망한 호열자 환자를 비롯하여 惡寒·피부병·연주창·매독·안질환자 등이었다.281)위와 같음.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환자는 유료로, 부랑자나 가난한 환자들은 무료로 진료하였다.

이어 미국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에서 파견된 하워드(Meta Howard)가 입국함에 따라 이화학당 구내에 최초의 부인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민비로부터 保救女館(Salvation for all Women Hospital)이라는 원명을 하사받았다. 미국북감리교 1891년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전년도에 정동병원에서 5,360명, 부인병원에서 1,576명(9개월간), 애오개진료소에서 상반기 6개월간 297명, 남대문병원에서 2개월간 300명 등 총 7,533명을 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282)이만열, 앞의 책(1998), 274쪽.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의료사업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 하나는 초기에 선교활동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시행되어 온 의료활동이, 선교의 자유가 주어짐에 따라 그 자체의 중요성과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각 선교회가 지방에 새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설치할 때에는 반드시 의료요원을 배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함으로써 서울 중심의 의료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각 교파 선교부가 지방에 파견한 의료진은 대략 다음<표 4>와 같다.283)白樂濬, 앞의 책, 345∼353쪽 참조.

지 역 교 파 의 료 진
선 천 북장로회 샤록스(A. M. Sharrocks)
원 산 북감리회
캐나다장로회
맥길(W. B. McGill), 하디(R. A. Hardie)
그리어슨(R. Grierson)
청 진 캐나다장로회 그리어슨, 맥밀리언(K. McMillian)
평 양 북감리회
북장로회
폴웰(E. D. Follwell), 홀(W. J. Hall)
웰즈(J. H. Wells)
재 령 북장로회 화이팅(H. C. Whiting)
송 도 남감리회 로스(J. B. Ross) 소오돈(D. E. Sawdon)
군 산 남장로회 다니엘즈(T. H. Daniels)
전 주 남장로회 잉골(M. Ingold)
부 산 북장로회 어빈(C. H. Irvin)
진 주 호주선교회 커렐(H. Currel)
광 주 남장로회 놀란(J. W. Nolan)
목 포 남장로회 포사이드(W. H. Forsythe)
대 구 북장로회 존슨(W. O. Johnson)

<표 4>각교파 선교부별 지방파견 의료진

제중원의 운영을 개혁하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바 있는 애비슨은 1899년 휴가차 미국에 가서 뉴욕에서 개최된 만국선교사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에서의 병원설립과 의학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감동한 클리브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Louis H. Serverance)로부터 15,000달러를 희사 받고 선교본부가 제공한 10,000달러의 기금을 합쳐 1904년에 남대문밖 복숭아골(도동)에 기금제공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을 건립하였다. 이 병원은 시내의 소규모 병원들을 통합하여 종합병원을 만들고 각 교파연합 의학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한국인 의사를 양성함으로 한국 근대의학 발전에 기여하였다.284)연세대학교창립백주년기념사업회,≪연세대학교백년사≫Ⅰ(1985),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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